등후[等候] 기다림. 등대(等待).
등후[鄧侯] 등우(鄧禹)를 말한다. 등우는 한 광무제(漢光武帝)를 섬겨 천하를 평정하고 중흥(中興)의 제일공신이 되었는데, 나이 24세에 대사도(大司徒)가 되고 찬후(酇侯)로 봉작되었다.
등후[滕侯] 등종량(滕宗諒)을 이른다. 등종량은 자(字)가 자경(子京)으로 송(宋)나라 하남(河南) 사람이다. 우정언(右正言), 좌사간(左司諫), 신주지주(信州知州)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신정(新政)을 주도한 범중엄(范仲淹)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경력(慶曆) 2년에는 경주지주(涇州知州)로 있었는데, 이때 서하(西夏)의 군사가 침입하여 경주(涇州)가 위태롭게 되었다. 등종량이 공금을 풀어 무비(武備)를 갖추고 병사들을 위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으나, 이후 이것이 빌미가 되어 신정(新政)을 반대하는 보수파들로부터 공금을 유용하였다는 공격을 받고 악주지주(岳州知州)로 좌천되었다.
등후[滕侯] 등후(滕侯)는 등 문공(滕文公)을 가리킨다. 등 문공이 부왕(父王)인 정공(定公)의 상을 당했을 적에, 국가의 관례를 고집하는 종친과 백관의 반대를 물리치고, 맹자에게 예법을 문의하여 삼년상을 정성껏 행하자 사방에서 조문 온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였다고 한다.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
등후[鄧后] 등후(鄧后)는 후한(後漢) 화제(和帝)의 황후(皇后)인 등씨(鄧氏)를 이른다. 등우(鄧禹)의 손녀이고, 등훈(鄧訓)의 딸이다. 화제가 승하한 뒤에 상제(殤帝)와 안제(安帝)를 차례로 세웠는데, 태후(太后)로서 20여 년 동안 임조(臨朝)하면서 덕정(德政)이 많았다. <후한서(後漢書) 권 10상(上)>
등후[鄧侯] 진(晉) 나라 때의 청백리(淸白吏)였던 등유(鄧攸)를 가리킨다. 등유는 오군 태수(吳郡太守)가 되어 먹는 물 이외는 한 다발의 땔감이나 한 말의 곡식도 백성들에게 취하지 않았다. 오군 태수(吳郡太守)로 선정을 베풀다가 떠날 즈음에 백성들이 그의 배가 출발하지 못하도록 한사코 막자 한밤중에 조각배를 타고 몰래 떠났는데, 백성들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둥둥 울리는 5경(更)의 북소리여, 닭 울음소리에 하늘이 밝아 오네. 등후는 끌어당겨도 머무르지 않고, 사령은 등을 떠밀어도 떠나지 않네.[紞如打五鼓 鷄鳴天欲曙 鄧侯拖不留 謝令推不去]”라고 하였다 한다. <晉書 卷90 良吏列傳 鄧攸>
등후불살초자[鄧侯不殺楚子] 등(鄧)은 춘추시대 나라 이름으로 지금 하남성(河南省) 등현(鄧縣)에 소재하였다. 당시 약소국이었으나 처음에 후작(侯爵)으로 봉해졌으므로 등후(鄧侯)라 칭하였다. 당시 등후(鄧侯)는 등(鄧)나라 19대 군주로 이름은 선(宣)이고 자는 오리(吾離)이다. 초자(楚子)는 초(楚)나라 무왕(武王)인 웅통(熊通)을 이른다. 무왕(武王)이 부인(夫人)을 얻기 위해 등(鄧)나라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등후(鄧侯)에게 이 틈을 타서 무왕(武王)을 죽일 것을 권하는 자가 있었으나, 등후(鄧侯)가 그 말을 물리치고 무왕(武王)으로 하여금 그대로 돌아가게 한 일이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 후 등(鄧)나라는 끝내 초(楚)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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