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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훈석구[鄧訓石臼], 등훈지음덕[鄧訓知陰德], 등흘둔전[鄧吃屯田], 뚤루게[都魯花]


등훈[鄧訓]  등훈(鄧訓)은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의 알자(謁者)로서, 등우(鄧禹)의 아들이자 화희황후(和熹皇后)의 아버지이다. 그는 호타하(虖沱河)와 석구하(石臼河)의 수로(水路)를 수리하여 곡식을 수송해서 해마다 수천 명을 살리고 많은 비용을 절약하였다. 석구하(石臼河)는 하북성(河北省) 호타하(滹沱河) 상류에 있는 한 지류이다. 등훈은 명제(明帝) 때 알자(謁者)로서 호타하와 분하(汾河) 사이에 운하를 놓는 일을 감독하게 되었는데, 자세히 측량한 뒤 공사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이러한 내용으로 상소를 올렸다. 그리하여 장제(章帝) 건초(建初) 3년(78) 4월에 그동안 익사하는 자가 헤아릴 수 없었던 이 역사를 중지하라는 조서가 내려짐으로써, 결과적으로 이 역사에 투입된 인부 수천 명을 살렸다고 한다. <後漢書 卷10 后紀上 和熹鄧皇后> <資治通鑑> <資治通鑑 卷46 漢紀38 章帝 上 建初 3年, 卷48 漢紀40 和帝 下 永元 4年>

등훈석구[鄧訓石臼]  등훈(鄧訓)의 석구(石臼)의 계책.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사람인데 호타하(虖沱河)와 석구하(石臼河)의 수로(水路)를 수리하여 곡식을 수송하자는 계획이다.

등훈지음덕[鄧訓知陰德]  등훈(鄧訓)은 등우(鄧禹)의 아들이자 화희황후(和熹皇后)의 아버지이다. 석구하(石臼河)는 하북성(河北省) 호타하(滹沱河) 상류에 있는 한 지류이다. 등훈은 명제(明帝) 때 알자(謁者)로서 호타하와 분하(汾河) 사이에 운하를 놓는 일을 감독하게 되었는데, 자세히 측량한 뒤 공사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이러한 내용으로 상소를 올렸다. 그리하여 장제(章帝) 건초(建初) 3년(78) 4월에 그동안 익사하는 자가 헤아릴 수 없었던 이 역사를 중지하라는 조서가 내려짐으로써, 결과적으로 이 역사에 투입된 인부 수천 명을 살렸다고 한다. 이에 등훈이 “천도는 믿을 수 있으니, 우리 집안이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다.[天道可信, 家必蒙福.]”라고 하였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등에는 “우리 형 등훈은 알자가 되어 석구하에 사람을 보내 정비하도록 해서 해마다 수천 명을 살렸다. 천리는 믿을 수 있으니, 우리 집안이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여, 황후의 숙부인 등해(鄧陔)의 말로 되어 있다. <後漢書 卷10 后紀上 和熹鄧皇后> <資治通鑑> <資治通鑑 卷46 漢紀38 章帝 上 建初 3年, 卷48 漢紀40 和帝 下 永元 4年>

등흘둔전[鄧吃屯田]  등흘(鄧吃)은 위(魏)나라 장수 등애(鄧艾)의 별명이다.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16에 “등애의 사당이 백수피(白水陂)의 위에 있다. 등애가 이곳에다 둔전(屯田) 49군데를 설치하였는데, 동서의 길이가 35리였다.[鄧艾廟在白水陂上, 去縣南一百二十裏. 艾於此置屯田四十九所. 其陂東西長三十五裏, 去縣百裏.]”라고 하였다.

뚤루게[都魯花]  고려 후기에 왕족이나 귀족의 자제로서 몽고에 볼모로 보내져 황성의 숙위 일을 맡아보던 자를 일컫는 몽고말이다. 일반적으로 독로화(禿魯花)로 표기된다.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에 처음으로, 고종 28년(1241) 4월에 왕의 족자(族子)인 영녕공(永寧公) 준(綧)을 왕자라 칭하여 양반가의 자제 10명을 거느리고 몽고로 들어가 뚤루게[禿魯花]가 되게 하였는데, 추밀원사 최린(崔璘)과 장군 김보정(金寶鼎), 좌사간 김겸(金謙)이 같이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로화(都魯花).

뚤루게[禿魯花]  원나라가 이민족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하나로, 인질로 데려온 대상국의 왕족과 귀족 자제를 인질로 데려오는 것이다. 고려에서는 1241년 고종 때 시작되어 1313년 충선왕 때까지 지속된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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