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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과[馬撾], 마과[馬窠], 마관시양[馬官廝養], 마광[馬光], 마광조[馬光祖]


마과[馬撾]  마과(馬撾)는 말채찍으로 馬檛(마과)라고도 쓴다. 원교(袁郊)의 감택요(甘澤謠) 홍선(紅線)에 “사신이 말채찍으로 문을 두드렸으나 만날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使者以馬撾扣門, 非時請見.]”라고 하였다.

마과[馬窠]  사행단의 경비를 충당하거나 칙사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운영하던 말을 사육하는 기관으로 추측된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숙종(肅宗) 44년 1월 21일 기사에 황해 병사 원휘(元徽)가 올린 장달(狀達)에서 “개성부(開城府)와 평안 감영(平安監營) 및 병영(兵營)과 의주 감영(義州監營)과 황해 감영 등 다섯 곳에는 모두 북경(北京), 심양(瀋陽) 등 다섯 곳의 마과가 있어 칙사에 대한 수요에 보태고 있으나 신의 영(營)에는 일찍이 이러한 규례가 없습니다. 한결같이 다섯 곳의 예에 의하여 마과도 실시하도록 하소서.”라고 청하자, 조태억(趙泰億)이 “다섯 곳의 마과도 역시 폐단이 많으니, 전에 없었던 곳에 새로이 만들어서는 옳지 않습니다. 지금 이 황해 병영의 마과는 거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한 기록이 보인다.

마과[馬窠]  사행(使行)에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중국으로 몰고 가는 말의 무리, 또는 말을 매매하여 경비를 마련하는 행위로 추측된다. 사행(使行) 때 필요한 경비를 은으로 지급하였지만 부족할 경우에 말을 몰고 가서 팔아 경비에 충당하기도 하였는데 마과에 따라간 상인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고대와 중세의 국제 화폐 기준은 말 값이었는데 대개 은으로 그 값을 환산하였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 7년 7월 5일 기사에 영조가 “말은 은이고, 은도 말이다.[馬是銀也 銀亦馬也]”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개성부(開城府), 평안 감영, 평안 병영, 의주 감영, 황해 감영의 5곳에 한하여 북경(北京)과 심양(瀋陽) 등의 5곳에 사행 나갈 때 마과를 두게 하였다. 황력재자관의 경우 당상 역관은 4과, 당하 역관은 3과로 제한하였고, 사행 때에는 5과로 제한하였다.

마관[馬官]  말을 담당한 관리. 찰방(察訪)을 이른다.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가 거기장군(車騎將軍) 환충(桓沖)의 기병참군(騎兵參軍)으로 있으면서, 머리는 쑥대 같고 허리띠는 풀어 헤친 채 자기 직무를 돌보지 않고 있었다. 환충이 “그대는 무슨 관서를 맡았는가?[卿署何曹]”라고 묻자 “무슨 관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때로 말을 끌고 오는 것을 보니, 아마도 마조인 듯합니다.[不知何署, 時見牽馬來, 似是馬曹.]”라고 하였다. 또 “관서에는 모두 얼마의 말이 있는가?[官有幾馬]”라고 하자 “공자가 말을 묻지 않았다 했으니 어떻게 그 숫자를 알 수 있겠습니까.[不問馬, 何由知其數.]”라고 하였다. 또 “말이 근래 얼마나 죽었는가?[馬北死多少]”라고 하자 “산 것도 모르는데 죽은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未知生, 焉知死.]”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簡傲> 마조(馬曹).

마관시양[馬官廝養]  마관(馬官)은 말을 관리하는 관원이고, 시양(廝養)은 군중에서 나무를 하거나 밥을 짓는 천한 일을 하는 자를 이른다. 한서(漢書) 노온서전(路溫舒傳)에 “시양을 공급해 주길 원한다.[願給廝養]”라 했는데, 위소(韋昭)가 말하기를 “땔나무 쪼개는 자를 시(廝)라 하고 불을 때서 밥을 짓는 자를 양(養)이라 한다.[析薪爲廝 炊烹爲養]”라고 하였다.

마광[馬光]  마광(馬光)은 한나라 명제(明帝)의 장인인 마원(馬援)의 아들이자 명제의 비 마 황후(馬皇后)의 오라버니로, 허후(許侯)에 봉해졌다. 명제의 아들인 장제(章帝)는 마 황후가 아닌 가 귀인(賈貴人)의 소생인데, 장제가 마 황후의 손에 자랐으므로 장제는 마광을 외숙으로 대하였다. 마광 형제는 모두 부귀가 극에 달하여 수많은 식객이 그 문하에 드나들었고, 자사(刺史)와 수령이 그 집안에서 배출되었다. 장제 8년에 유사(有司)가 “마광 형제의 사치가 극에 달하여 성화(聖化)를 어지럽히니, 모두 면직시키고 봉지로 보내소서.”라고 하였는데, 장제가 조서를 내려 “외숙이 모두 봉지로 가면 사시(四時)에 능묘(陵廟)에 제사할 때 곁에서 도울 사람이 없을 것이니, 짐은 몹시 마음이 아프다. 허후로 하여금 전원에서 허물을 반성하게 하고, 유사는 더 청하지 말아서, 외숙에 대한 짐의 정의(情誼)를 위로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마광조[馬光祖]  남송(南宋)의 명신(名臣). 송(宋)나라 금화(金華) 사람으로 자는 화보(華父), 호는 유재(裕齋), 시호는 장민(莊敏), 벼슬은 강동 안무사(江東安撫使), 건강지부(建康知府) 등 외직을 거쳐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지임안부(知臨安府)를 지냈고, 지건강부(知建康府)가 되어 조세를 감면하고 빈민(貧民)을 구제하였다. 한결같이 법도와 기강을 세우고 혜정(惠政)을 베풀었다. <宋史 卷416 馬光祖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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