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다천하[馬多天下] 한유(韓愈)의 송온처사부하양군서(送溫處士赴河陽軍序) 첫 대목에 “대저 기주(冀州) 북쪽은 천하에서 가장 많이 말이 생산되는 곳이다.[夫冀北馬多天下]”라는 구절이 나온다.
마단림[馬端臨] 송말(宋末)·원초(元初)의 학자. 송나라 요주(饒州) 낙평인(樂平人)이다. 자는 귀여(貴與), 호는 죽주(竹洲)이다. 송(宋)나라 때 과거에 장원했으나, 원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은둔하고 벼슬하지 않았고, 학관(學官)으로 기용되었으나 곧 사직했다. 송이 망한 뒤 자호서원(慈湖書院)과 가산서원(柯山書院)의 원장, 태주 교수(台州敎授) 등을 지냈다. 자신의 학문을 집대성하여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통시적으로 기술한 문헌통고(文獻通考)를 편찬하였다. 대학집전(大學集傳),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의 저서가 있다.
마단림[馬端臨] 마단림(馬端臨)의 자는 귀여(貴與), 호는 죽주(竹洲)로, 강서(江西) 요주(饒州) 낙평현(樂平縣) 사람이다. 부친은 남송 때에 재상을 지낸 마정란(馬廷鸞)이다. 일찍부터 서적에 널리 정통하였고, 함순(咸淳) 9년(1273) 조시(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송나라가 망한 뒤 은거하여, 부친 마정란의 친구였던 유몽염(留夢炎)이 중용하려 하였음에도 연로한 양친을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문헌통고(文獻通考) 편저에 힘을 쏟았는데, 원나라 인종 연우(延祐) 4년(1317)에 요주로(饒州路) 교수에 의해 인쇄 간행하여 널리 유포해야 한다는 주청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초고는 이 무렵에 이미 완성된 듯하다. 하지만 교정과 윤색을 마쳐 간행한 것은 이로부터 다시 5년이 지난 영종(英宗) 지치(至治) 2년인 1322년 6월이었다. 이듬해 마단림은 세상을 마쳤다. 문헌통고는 총 348권으로 이루어졌으며, 중국 역대의 전장제도를 서술한 책으로서 두우(杜佑)가 엮은 통전(通典)의 속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마단림이 20여 년간 노력한 끝에 1307년에 완성하였다. 구성은 모두 24고(考)로 대부분이 통전의 항목을 세분한 다음에 경적고(經籍考)·제계고(帝系考)·봉건고(封建考)·상위고(象緯考)·물이고(物異考)의 5고(考)를 새로 추가하였다. 경적고(經籍考)는 권174에서 권249까지 모두 76권에 걸쳐 있다. 마단림은 특히 ‘문헌’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옛 경전과 사서를 인용하였으므로 문(文)이라 하였고, 당송 이후의 신하들의 주소와 학자들의 의론을 참고하였으므로 헌(獻)이라 하였다.[引古經史謂之文, 參以唐宋以來諸臣之奏疏諸儒之議論謂之獻.]”라고 설명하였다. <四庫全書總目提要 卷81 史部37 政書類1>
마답[麻答] 거란(契丹)의 장수 야율마답(耶律麻答)이다. 후에 야율덕광(耶律德光)을 따라 후진(後晉)을 멸망시켰다.
마대[麻帶] 삼으로 꼰 띠를 말한다.
마대[馬戴] 생몰년은 미상(未詳)이다. 자(字)는 우신(虞臣)으로 곡양인(曲陽人)이다. 화주인(華州人)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무종(武宗) 회창(會昌) 4년(844)에 진사(進士)가 되어 태학박사(太學博士) 등을 지냈다. 만당(晩唐)의 시인으로 전당시(全唐詩)에 시집 2권이 전한다.
마대년[馬大年] 마영경(馬永卿). 자기 대년(大年)이다. 1109년 진사(進士)가 되었다. 영성주부(永城主簿)로 있을 때 박주(亳州)로 유배를 온 유안세(劉安世)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강도(江都), 석천(淅川), 하현(夏縣), 관중(關中)에 관리로 나갔었다. 저서로 원성어록(元城語錄), 눈진자(嫩眞子) 등이 있다.
마대비강사[馬隊非講肆] 도잠(陶潛)의 시 시주속지조기사경이삼랑(示周續之祖企謝景夷三郞)에 “말 시장이 가까워 공부할 수 없거늘, 서적 교감을 또한 부지런히 했구려.[馬隊非講肆, 校書亦已勤.]”라고 하였다. <陶淵明集 卷2 示周續之祖企謝景夷三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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