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등[馬鄧] 동한(東漢)의 명덕황후(明德皇后) 마씨(馬氏)와 화희황후(和熹皇后) 등씨(鄧氏)의 합칭으로, 모두 어진 덕이 있었다. 마후(馬后)는 후한(後漢)의 명장인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의 딸로 명제(明帝)의 후비(后妃)가 된 마 황후(馬皇后)를 이른다. 덕(德)이 뛰어나고, 사가(私家)의 일을 가지고 조정에 청탁하지 않았으며, 명제가 죽고 장제(章帝)가 즉위하여 외숙(外叔)들을 봉작(封爵)하려 하였으나 마후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등후(鄧后)는 후한(後漢)의 명신인 등우(鄧禹)의 손녀로 화제(和帝)의 후비가 된 등 황후(鄧皇后)를 이른다. 처음에 액정(掖庭)에 들어가 귀인(貴人)이 되었는데 행동에 법도가 있고 용모가 아름다웠고, 음후(陰后)가 폐출(廢黜)되자 황후가 되었으며, 화제가 죽은 뒤에는 상제(殤帝)·안제(安帝) 때에 태후(太后)로서 10여 년 동안 정사에 임하여 덕정(德政)이 많았다.
마등[摩登] 마등(摩登)은 종족(種族)의 이름으로 음탕한 여자 발길제(鉢吉帝)를 가리킨다. 그는 주술을 가지고 석가의 종제(從弟)이며 10대 제자의 하나인 아난을 유혹하려 했으나 아난은 석가의 힘으로 그를 물리쳤다 한다.
마등가[摩登伽] 마등가(摩登迦)는 부처 생존시의 음녀(淫女)로서, 요술로 아난(阿難)을 유혹하여 아난이 이에 넘어가서 파계(破戒)하려 할 때 부처가 이를 알고 아난도 구제하고 마등가도 중이 되게 하였다 한다. 능엄경(楞嚴經)에 “아난(阿難)이 밥을 빌러 나갔다가 음녀(淫女)인 마등가(摩登伽)의 유혹에 빠졌을 때, 부처가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보내어 음녀의 마술을 깨뜨리고 구출했다.”고 하였다.
마등가녀[摩登伽女] 불교에서 말하는 음녀(淫女)의 이름인데, 그의 딸 발길제(鉢吉帝)를 시켜 환술(幻術)로 석가모니의 수제자인 아난(阿難)을 유혹하여 파계하게 하자, 석가모니는 이를 알고 신주(神呪)를 외어 아난을 구제하였다 한다.
마등고조[馬鄧高曹] 한(漢)나라의 명제(明帝)의 후(后)인 마 황후(馬皇后), 안제(安帝)의 후(后)인 등 태후(鄧太后)와 송(宋)나라의 영종(英宗)의 후(后)인 고 황후(高皇后), 인종(仁宗)의 후(后)인 조 황후(曹皇后)를 말함. 마(馬)는 후한(後漢) 때 마원(馬援)의 딸로 명제(明帝)의 후비가 된 명덕 마황후(明德馬皇后)를 가리키는데, 그는 특히 덕이 후궁(後宮)에 으뜸이었고 근면 검소하였으며 사가(私家)의 일을 조정에 전혀 말하지 않았다 한다. 등(鄧)은 후한 화제(後漢和帝)의 후비인데, 그는 매우 공경스럽고 소심(小心)하여 모든 일이 법도에 맞았다고 한다. 고(高)는 송 영종(宋英宗)의 후비인데, 그는 철종(哲宗)이 즉위한 뒤에는 태황태후(太皇太后)로서 어린 임금을 위해 섭정(攝政)하면서 왕안석(王安石)의 도당을 물리치고, 사마광(司馬光) 등의 현신(賢臣)들을 등용하여 태평의 정치를 이룸으로써 당시에 여중 요순(女中堯舜)이란 칭찬을 받기까지 하였다. 조(曹)는 송 인종(宋仁宗)의 후비인데, 그는 성품이 인자하고 검소하며, 특히 농사를 중히 여겨 항상 금원(禁苑)에 곡식을 심고, 친히 누에를 기르기까지 하였다 한다.
마등어조[馬騰於槽] 당(唐)나라 한유(韓愈)가 지은 평회서비(平淮西碑)에 “군사들은 배불리 먹고 노래하며, 말들은 말구유에서 뛰논다.[士飽而歌 馬騰於槽]”라고 하였는데, 이는 군중(軍中)에 군량과 말꼴이 충분하여 군사의 사기가 드높은 것을 가리킨다. <古文眞寶 後集 卷3>
마등홍[馬登紅] 조선의 명장 임경업(林慶業)이 천신만고 끝에 명나라로 망명하자 명황(明皇) 의종(毅宗)은 그에게 부총병을 제수하고 명군과 함께 청의 심양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임경업은 명군 장수 황용(黃龍)·마등홍(馬登紅) 등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갔다. 그러나 이후 청황(淸皇) 세조(世祖)가 친히 이끈 청군의 강성한 기세에 겁을 먹은 황용은 도망치고, 마등홍은 제 살 길을 찾기 위해 임경업을 포박하여 청군 진영에 항복했다.
마등후[馬鄧后] 동한(東漢) 때의 마 황후(馬皇后)와 등 황후(鄧皇后)를 가리킨다. 마 황후는 후한(後漢) 마원(馬援)의 딸로 명제(明帝)의 후비(后妃)가 되었는데, 부덕(婦德)이 후궁(後宮)에서 으뜸이었고, 사가(私家)의 일로 조정에 간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등 황후는 후한 화제(和帝)의 황후인데 훌륭한 인품을 지녀 많은 덕정(德政)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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