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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소유[馬少游], 마소유관단마[馬少游款段馬], 마속사수상산[馬謖舍水上山]


마소유[馬少游]  후한의 명장(名將) 마원(馬援)의 종제(從弟)이다. 마원이 남방(南方)인 교지(交趾)로 정벌을 나가 적군 수천 급(級)을 참획(斬獲)하고 크게 격파하여 신식후(新息侯)에 봉해졌는데, 이때 군사들을 호궤(犒饋)하면서 부하 관속에게 이르기를 “나의 종제 소유가 일찍이 내가 웅지를 품고 세상에 나가 크게 활동하는 것을 마땅찮게 여겨 말하기를 ‘선비가 세상에 나서 의식(衣食)이나 해결할 만하거든, 하택거(下澤車)를 타고 관단마(款段馬)를 몰고 선영의 분묘나 잘 수호하며 조용히 지내서 향리로부터 선인(善人)이란 말만 들으면 될 것이요, 넘치는 행복을 구하는 것은 스스로 괴로울 뿐이다.’라고 하더니, 내가 이곳에 와서 미처 노(虜)를 멸하기도 전에 장열(瘴熱)의 훈증(薰蒸)으로 인하여 솔개가 수중(水中)으로 툭툭 떨어지는 것을 쳐다보면서, 내 종제가 평상시에 하던 말을 생각해 보았지만, 이제는 어쩔 수가 없구나.[吾從弟少遊嘗哀吾慷慨多大志 曰: ‘士生一世, 但取衣食裁足, 乘下澤車, 御款段馬, 為郡掾吏, 守墳墓, 鄉里稱為善人, 斯可矣. 致求盈餘, 但自苦耳,’ 當吾在浪泊·西里·烏間, 虜未滅之時, 下潦上霧, 毒氣熏蒸, 仰視烏鳶跕跕墮水中, 臥念少遊平生時語, 何可得也!]”라고 했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마소유관단마[馬少游款段馬]  마소유(馬少游)는 후한(後漢)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의 사촌 동생이다. 마소유는 마원이 웅지를 품고 세상에 나가 크게 활동하는 것이 못마땅한 나머지 “선비가 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옷 입고서 달구지에 올라앉아 느릿느릿 걷는 말을 몰며, 고을의 작은 관리가 되어 선조의 무덤을 지키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것을 벗어나 더 큰 명리(名利)를 추구하는 것은 스스로 괴로움을 찾는 것일 뿐입니다.[士生一世, 但取衣食裁足, 乘下澤車, 御款段馬, 為郡掾史, 守墳墓, 鄉里稱善人, 斯可矣. 致求盈餘, 但自苦耳.]”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마소유하택거[馬少遊下澤車]  마소유(馬少游)는 후한(後漢) 때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의 종제(從弟)이다. 하택거(下澤車)는 마원이 향리로 돌아온 후에 항상 타고 다니던 수레로서, 전간(田間)의 진펄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수레이다. 일찍이 마소유가 마원에게 말하기를 “선비가 한 세상을 살면서 다만 의복과 음식이 충족하기만 취하여 작은 수레를 타고 작은 말을 몰면서 군의 아전이 되어 선산을 지키고 향리에서 선인이라 일컬어지면 될 것이지 가득함을 구하려 하면 다만 스스로 괴로울 뿐이다.[士生一世, 但取衣食裁足, 乘下澤車, 禦款段馬, 爲郡掾史, 守墳墓, 鄕里稱善人, 斯可矣, 致求盈餘, 但自苦耳.]”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마속[馬謖]  양양(襄陽) 의성(宜城) 사람으로, 자는 유상(幼常)이다. 중국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문신으로 재기가 뛰어났다. 제갈량과 절친한 마량(馬良)의 동생인데 뛰어난 재략으로 제갈량에게 중용되었다. 제갈량이 위(魏)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기산(祈山)으로 출병할 때 마속을 선발해서 군을 통솔하게 했는데, 군량 보급로인 가정(街亭)의 수비를 자원하고 나섰다가 위(魏)나라 장군 장합(張郃)과 싸웠는데, 제갈량의 지시를 어기고 무리한 작전을 편 나머지 크게 패배당하고 돌아와 옥에 갇혀 있다가 군법에 따라 처형당하여 읍참마속(泣斬馬謖)이란 말이 나오게 된 장본인이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傳>

마속[馬謖]  마속(馬謖)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장수로, 제갈량(諸葛亮)의 총애를 받았다. 건흥(建興) 6년(228)에 제갈량(諸葛亮)이 위(魏)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한중(漢中)을 나서 기산(祁山)으로 향할 적에, 사람들은 경험이 많은 위연(魏延) 등을 선봉(先鋒)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으나, 제갈량(諸葛亮)은 평소에 아끼던 마속(馬謖)을 선봉으로 발탁하여 위(魏)나라 장수 장합(張郃)과 가정(街亭)에서 싸우도록 하였는데, 마속(馬謖)이 제갈량(諸葛亮)의 지휘를 어기고 산 위에 진을 쳤다가 장합(張郃)에게 대패하였다. 이에 제갈량(諸葛亮)은 진격하여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퇴군(退軍)하여 한중(漢中)으로 돌아왔으며, 마속(馬謖)은 옥에 갇혀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로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故事)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제갈량(諸葛亮)이 직접 마속(馬謖)을 참수형(斬首刑)에 처한 것은 아니다. <三國志 권39 董劉馬陳董呂傳>

마속득이혹공명[馬謖得以惑孔明]  마속(馬謖)이 공명(孔明)을 혼란스럽게 함. 마속(馬謖)의 자는 유상(幼常)으로 마량(馬良)의 아우이다. 재주가 있어 군무(軍務)에 관해 논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유비(劉備)가 죽으면서 제갈량(諸葛亮)에게 그는 말이 실제보다 지나쳐 크게 쓸 인물이 못 된다고 하였으나, 제갈량(諸葛亮)은 그렇지 않다고 여기고 참군(參軍)으로 삼았다. 그러나 가정(街亭)에서 위(魏)나라 장수 장합(張郃)에게 크게 패하여 하옥한 뒤에 처형하였다. <三國志 蜀志 권9 馬謖列傳>

마속사수상산 불하거성[馬謖舍水上山 不下據城]  마속(馬謖)이 물을 버리고 산(山)으로 올라가서는 내려가 성(城)을 점거하지 않음. 마속(馬謖)은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장수로, 평소 지혜가 뛰어나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의 총애를 받았다. 건흥(建興) 6년(228)에 제갈량(諸葛亮)이 위(魏)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한중(漢中)을 나서 기산(祁山)으로 향할 적에, 마속(馬謖)을 선봉으로 발탁하여 위(魏)나라 장수 장합(張郃)과 가정(街亭)에서 싸우도록 하였는데, 마속(馬謖)이 제갈량(諸葛亮)의 지휘를 어기고 산 위에 진을 쳤다가 식수원이 끊겨 패배하였다. <三國志 권39 董劉馬陳董呂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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