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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원[馬援], 마원과시[馬援裹屍], 마원과혁[馬援裹革], 마원교지서[馬援交趾書]


마원[馬援]  왕망(王莽)이 전한(前漢)을 멸망시킨 후 후한(後漢)의 건국을 도운 장군이다. 처음에는 왕망의 신(新)나라에서 벼슬을 했으나 결국에는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의 신하가 되었다. 35년 화남(華南) 지방의 태수로 임명되어 남쪽으로 지금의 북베트남에 이르는 지역까지 중국의 지배권을 다시 확립했다. 45년에는 북방 국경지대로 파견되어 중앙아시아의 흉노족을 제압하는 데 힘썼다. 마원은 죽은 다음 신(神)으로 받들어졌다.

마원[馬援]  중국 후한(後漢)의 장군이다. 광무제를 도와서 태중대부(太中大夫), 농서태수(隴西太守)를 지내며 이민족을 토벌하였다. 후에 복파장군(伏波將軍)에 임명되어 교지(交趾) 즉 북베트남의 반란을 평정하여 신식후(新息侯)가 되었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대장부는 마땅히 싸움터에서 죽어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 가지고 돌아와 장사를 지낼 뿐이다. 어찌 침대 위에 누워 여자의 시중을 받으며 죽으랴.[大丈夫當以馬革屍裹, 安能死兒女手.]”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마원[馬援]  마원(馬援)은 자가 문연(文淵)으로 부풍(扶風) 무릉(茂陵) 사람이다. 일찍이 왕망(王莽)에게 발탁되어 신성(新成)의 대윤(大尹)을 지냈고, 후에 외효(隗囂)에게 중용되었다. 마원이 외효의 명으로 광무제(光武帝)에게 사신을 가서 광무제(光武帝)의 도량과 학식이 출중함을 보고서 한 고조(漢高祖)보다 낫다고 외효에게 보고하였고, 얼마 후에 광무제(光武帝)에게 귀순하였다. 외효는 마원의 말에 따라 맏아들을 한나라에 볼모로 보냈다가 얼마 후에 공손술(公孫述)의 신하가 되어 반란을 일으키니, 공손술은 외효를 삭녕왕(朔寧王)에 봉해주었다. 광무제(光武帝)가 친히 외효를 토벌하는 즈음에 마원은 쌀을 수북히 쌓아놓고 지세의 형승과 군대의 요충 등을 광무제(光武帝)에게 자세히 설명하니, 광무제(光武帝)는 “오랑캐가 내 눈 속에 있도다.”라고 감탄하였다. 광무제(光武帝)는 군대를 진군시켜 외효의 군대를 쳐서 크게 무찔렀고, 외효는 서성(西城)으로 달아나 울분에 겨워 굶어 죽었다. <後漢書 卷54 馬援列傳> <史略 卷3 東漢> 자양(子陽)은 공손술의 자(字)이다.

마원[馬援]  후한(後漢)의 명장인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일찍이 남방(南方)인 교지(交趾)로 정벌을 나가서 적군 수천 급(級)을 참수(斬首)하고 크게 격파하여 신식후(新息侯)에 봉해졌는데, 이때 군사(軍士)들을 호궤(犒饋)하면서 부하 관속(官屬)에게 이르기를 “나의 종제(從弟) 소유(少游)가 일찍이 말하기를 ‘선비가 세상에 나서 의식(衣食)이나 해결할 만하여 하택거(下澤車)를 타고 관단마(款段馬)를 몰고 선영의 분묘(墳墓)나 잘 수호하며 조용히 지내서 향리로부터 선인(善人)이란 말만 들으면 될 것이요, 넘치는 행복을 구하는 것은 스스로 괴로울 뿐이다.’라 하더니, 내가 이곳에 와서 미처 노(虜)를 멸하기 전에 장열(瘴熱)의 훈증(薰蒸)으로 인하여 솔개가 수중(水中)으로 툭툭 떨어지는 것을 쳐다보면서 내 종제가 평상시에 하던 말을 생각해 보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라고 하였고, 또 그가 교지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의이(薏苡)의 열매를 복용하여 장기(瘴氣)를 이겨 낸 경험이 있어 그곳의 의이를 종자(種子)로 삼기 위해 돌아올 적에 이것을 한 수레 싣고 왔었는데, 그가 죽은 뒤에 혹자가 이것을 남방의 진괴(珍怪)한 보물이라고 천자에게 참소함으로써 끝내 신식후의 봉작이 추탈되기까지 했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마원과시[馬援裹屍]  마원(馬援)은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 때의 명장(名將)으로, 그의 말 중에 “대장부라면 마땅히 전쟁터에서 죽어 말가죽에 시체가 싸여 돌아와 묻혀야 한다.[男兒要當死于邊野, 以馬革裹尸還葬耳.]”라고 한 것을 이른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이는 곧 대장부는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마원과혁[馬援裹革]  과혁(裹革)은 가죽에 싼다는 뜻으로,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뒤 말가죽에 싸여 돌아오려고 했던 마음이란 뜻이다.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사나이라면 마땅히 전쟁터에서 죽어 말가죽에 시체를 싸 가지고 돌아와 장사 지내야 한다.[男兒要當死于邊野, 以馬革裹尸還葬耳.]”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실제로 마원이 죽은 뒤에 그 가족들은 모함하는 자들에게 빌미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 제대로 예를 갖추지 못하고 간소하게 장사를 지냈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마원교지서[馬援交趾書]  마원(馬援)의 교지서(交趾書). 후한(後漢) 때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교지에서 조카들에게 보낸 경계하는 편지를 이른다. 마원이 조카 마돈(馬敦)에게 글을 보내어 “용술(龍述)은 신중하고 위엄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를 본받으면 행검(行檢) 있는 선비는 될 수 있으니, 이른바 ‘고니를 새기다가 완성을 못하더라도 집오리처럼 될 수는 있다.[刻鵠不成 尙類鶩]’는 것이다. 하지만 두보(杜保)는 호협(豪俠)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를 본받다가는 천하의 경박한 사람이 될 것이니, 이른바 ‘범을 그리다가 완성하지 못하면 도리어 개같이 되어 버린다.[畫虎不成 反類狗]’는 것이다.”라고 경계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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