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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융[馬融], 마융거전[馬隆車戰], 마융입표간시[馬隆立標揀試], 마융정현[馬融鄭玄], 마읍[馬邑]


마융[馬融]  후한(後漢: 동한東漢)의 경학가이다. 부풍(扶風) 무릉(茂陵) 사람으로 자는 계장(季長)으로 마엄(馬嚴)의 아들이다. 고문경학(古文經學)에 정통하였다. 그는 경서를 주해할 적에 고문 경학의 설을 위주로 하면서도 금문 경학의 설을 아울러 취하였다. 교서랑(校書郎), 남군태수(南郡太守), 의랑(議郎)을 역임하였다. 양기(梁冀)가 이고(李固)를 탄핵할 때 글의 초안을 잡았고, 또 서제송(西第頌)을 지어 찬양하여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다. 제자만 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노식(盧植)과 정현(鄭玄) 등도 포함되어 있다. 저서에 춘추삼전이동설(春秋三傳異同說)이 있으며, 효경(孝經), 논어(論語), 시경(詩經), 주역(周易), 삼례(三禮), 상서(尙書), 열녀전(列女傳), 노자(老子), 회남자(淮南子), 이소(離騷) 등을 편찬하고 주를 달았다고 하는데 모두 전하지 않는다.

마융[馬隆]  마융(馬隆)은 진 무제(晉武帝)의 신하이다. 어비역대통감집람(御批歴代通鑑輯覽) 촉한제(蜀漢帝)에 “선비(鮮卑) 수기능(樹機能)이 양주(涼州)를 함락하자, 진 무제가 조정에 나와 탄식하며 말하기를 ‘그 누가 나를 위해 저 오랑캐를 토벌한단 말인가?’라고 하니, 사마독(司馬督) 마융이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신이 용사 3천인을 과거를 묻지 않고 모집하여 거느리고 서진(西進)하면 평정할 것조차도 없습니다.’라고 하자, 무제가 허락하고 그를 토로장군(討虜將軍) 무위태수(武威太守)로 임명하나, 마융이 사균(四鈞)의 활을 당기고 구석(九石)의 쇠뇌를 당길 수 있는 자를 모집하여, 표지를 세워 놓고 시험을 보여 3천 5백 인을 얻었다.[鮮卑樹機能陷凉州, 帝甚悔之, 臨朝而歎曰: ‘誰能爲我討此虜者?’ 司馬督馬隆進曰: ‘臣願募勇士三千人, 無問所從來, 帥之以西, 虜不足平也.’ 帝許之, 以為討虜將軍·武威太守, 隆募能引弓四鈞·挽弩九石者取之, 立標簡試, 自旦至日中, 得三千五百人.]”라고 하였다. 마륭(馬隆). <晉書 卷57 馬隆列傳>

마융거전[馬隆車戰]  진(晉)나라 마융이 선비(鮮卑) 수기능(樹機能)을 참살(斬殺)하고 양주(涼州)를 평정할 적에 편상거(偏箱車)라는 수레를 이용하여 대승을 거둔 고사가 전하고, 당(唐)나라 방관(房琯)이 안녹산(安祿山)의 장수 안수충(安守忠)과 진도사(陳濤斜)에서 싸울 적에 거전(車戰)의 작전을 썼다가 대패한 고사가 전한다.

마융입표간시[馬隆立標揀試]  마융(馬隆)이 표지(標識)를 세우고 골라 시험함. 마융은 진(晉) 나라 때 사람으로, 무제(武帝)가 오(吳) 나라를 정벌하려 할 때 무위 태수(武威太守)를 삼았는데, 용사(勇士) 3000명을 출신에 관계없이 뽑기를 청하고는 허리로 쇠뇌 36균(鈞)과 활 4균을 당길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한다고 표지를 세우고 골라 시험하여 반나절 만에 3500명을 얻어 크게 전과를 세웠던 일을 말한다. <晉書 卷57 馬隆列傳>

마융정현[馬融鄭玄]  마융(馬融)과 정현(鄭玄). 마융(馬融)은 후한(後漢)의 학자로서 자는 계장(季長)이다. 학식이 해박하고 재능이 높아 천여 명의 문도들을 가르쳤는데, 당대의 석학인 정현(鄭玄) 노식(盧植) 등이 그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정현(鄭玄)은 후한의 학자로 자가 강성(康成)이고 고밀(高密) 출신이며 마융(馬融)의 제자이다. 모시전(毛詩箋), 삼례주(三禮註), 역주(周易註) 등을 저술하여 한대(漢代) 경학(經學)의 집성자로 불린다.

마읍[馬邑]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에 속했던 현명(縣名)이다.

마읍[馬邑]  진한(秦漢) 때 흉노를 방어하던 중요한 진(鎭)이다. 지금의 중국 산서성(山西省) 북부에 있는 안문군(鴈門郡) 마읍현(馬邑縣)으로, 중국과 흉노의 접경 지역이어서 역대로 서로 간에 쟁탈하는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문제(文帝) 이후 한나라와 흉노는 화친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무제(武帝)가 즉위해서는 흉노와의 굴욕적인 화친에 불만을 품어 흉노를 정벌하고자 하면서도 한안국(韓安國) 등이 “흉노를 정벌해서 이긴다고 해도 실익이 없다.”라고 주장함에 따라 공격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마읍의 호족인 섭옹일(聶翁壹)이 흉노를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왕회(王恢)를 통해 무제에게 “흉노는 처음 화친한 이후로 변경의 백성들을 믿고 있습니다. 이익을 준다는 미끼로 유인한 다음 공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왕회 역시 흉노를 쳐야 한다고 적극 주장하였다. 이에 무제는 왕회에게 3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 흉노를 정벌하게 하였다. 왕회는 마읍 골짜기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선우를 유인하여 습격하려 하였으나, 선우가 그 사실을 미리 알고 달아나 버림으로써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무제의 흉노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왕회는 수모자(首謨者)로서 진격(進擊)하지 않았다는 죄로 하옥되어 죽었다. <漢書 卷6 武帝本紀>

마읍[馬邑]  한왕 성(韓王成)이 죽은 뒤에 다시 한왕에 봉해진 한왕 신(韓王信)이 마읍(馬邑)을 도읍으로 정했다. 그러나 흉노(匈奴)의 협박에 못 이겨 그들과 화해를 맺는 한편, 함께 한나라를 공격하기로 약속하고 이어 도읍지인 마읍을 가지고 흉노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끝내 한(漢)의 장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史記 卷93 韓信列傳>

마응방[馬應房]  조선 중기의 의병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크게 활약하고,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남원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뒤에 이조 참판에 추증되고, 남원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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