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생풍[馬耳生風] 바람이 말[馬]의 귀에 스쳐도 아무 감각이 없듯이, 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는 말이다. 소식(蘇軾)의 시 화하장관육언시(和何長官六言詩)에 “시조의 공자에게 말해보았자 말 귀의 동풍과 무엇이 다르랴.[說向市朝公子, 何殊馬耳東風.]”라고 하였다.
마이십승[馬二十乘] 말 80마리. 승(乘)은 말을 세는 단위로 네 마리이다.
마이진[蟇頤津] 사천성(四川省) 미산현(眉山縣) 동쪽 파리강(坡璃江)에 있는 나루터이다. 당 희종(唐僖宗) 때에 좌습유(左拾遺) 맹소도(孟昭圖)가 글을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였다가 마이진에 던져져 죽었다. <방여승람方興勝覽>.
마익[馬杙] 말이나 소를 매는 말뚝이다.
마인환[麻仁丸] 상한양명병(傷寒陽明病)으로 몸속의 진액이 마르거나 비장(脾臟)의 기능 장애로 진액이 생기지 않아 대장의 진액이 몹시 부족한 증상을 치료한다. 대황(大黃), 마자인(麻子仁), 적작약(赤芍藥), 지실(枳實), 행인(杏仁), 후박(厚朴)으로 구성된다.
마일제[馬日磾] 중국 후한(後漢) 말의 정치인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원술전(袁術傳) 주에 인용된 삼보결록주(三輔決錄注)에 의하면, 마일제는 자가 옹숙(翁叔)으로 동한의 저명한 경학가(經學家) 마융(馬融)의 집안 조카이다. 어려서부터 마융의 수업을 전수 받아 재주와 학문으로 벼슬길에 들었으며 일찍이 태위(太尉)를 지냈다. 이각이 권력을 전횡할 때, 마일제를 사자로 삼아 부절을 지니고 원술에게 가서 원술을 좌장군(左將軍)으로 삼고 양적후(陽翟侯)로 봉하게 한다. 그러나 원술은 부절을 빼앗고 마일제를 구금하니 마일제는 부절을 빼앗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하였고,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는 “처음에 마일제(馬日磾)가 조기(趙岐)와 함께 사명(使命)을 받들어 수춘(壽春)에 이르렀는데, 조기가 뜻을 지켜 굽히지 않자 원술(袁術)이 그를 꺼렸다. 마일제가 원술에게 요구하는 바가 자못 많았는데, 원술이 조정에서 마일제에게 준 사절(使節)을 빌려서 보다가 빼앗고 돌려주지 않았다. 마일제가 떠나갈 것을 청하였으나 원술이 억류하고 보내주지 않으니, 마일제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라고 하였다. 또, 자치통감(資治通鑑) 권60 한기(漢紀)에, 채옹(蔡邕)은 한나라 말기의 유명한 문사(文士)로, 자가 백개(伯喈)인데, 당시에 태위(太尉)로 있던 마일제(馬日磾)가 채옹에 대해 “백개는 이 세상에 드문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며, 한나라의 고사에 대해서 많이 안다.[伯喈曠世逸才, 多識漢事.]”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후한서(後漢書) 권90하 채옹열전(蔡邕列傳)에, 후한(後漢) 헌제(獻帝) 때 사도(司徒) 왕윤(王允)이 정권을 전횡하던 동탁(董卓)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는데, 당시 동탁에 의해 중용되었던 채옹(蔡邕)이 동탁의 죽음을 탄식하자, 왕윤이 노하여 채옹을 죽이려 하였다. 태부(太傅) 마일제(馬日磾)가 이를 만류하였으나 왕윤이 끝내 마일제의 권유를 듣지 않고 채옹을 죽이자, 마일제는 “왕공(王公)은 후사가 없을 것이다. 선인(善人)은 나라의 기강이고 제작(制作)은 나라의 법전인데 기강을 없애고 법전을 폐하고도 어찌 장구할 수 있겠는가.[王公其無後乎! 善人, 國之紀也; 制作, 國之典也. 滅紀廢典, 其能久乎?]”라고 개탄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일중이출[馬日中而出] 좌전(左傳)에 “말이 일중에 나온다.[馬日中而出]”라고 하였다. 말은 춘분에 내보내고 추분에 마구간을 수리하여 들인다는 말이니, 일중(日中)은 춘분과 추분을 가리킨다.
마입진애학입롱[馬入塵埃鶴入籠] 관직에 매여 자유롭지 못하게 속세를 분주히 돌아다닌 것을 가리킨다. 소식(蘇軾)의 시 차운주빈기안탕산도2수(次韻周邠寄雁蕩山圖二首) 기2(其二)에 “서호에서 삼년을 그대와 함께 지내다, 말은 흙먼지 속에 들고 학은 새장에 들어가네. 나는 홀로 동해로 와 해 뜨는 것 바라보고, 그대는 돌다리를 먼저 건너 무지개를 밟았네.[西湖三載與君同, 馬入塵埃鶴入籠. 東海獨來看出日, 石橋先去踏長虹.]”라고 한 데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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