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자[馬訾] 압록강이다. 통전(通典)에 압록강을 마자수(馬訾水)라고 기록하였다.
마자불신[麻者不紳] 마질(麻絰)을 두르고 있으면 신은 사용하지 않음. 예기(禮記) 잡기 하(雜記下)에 “이미 상복을 입고 마질을 두르고 있으면 신은 사용하지 않고, 만일 옥을 잡고서 길례를 행한다면 마질은 사용하지 않으며, 또 마질은 빛깔이 있는 옷에는 사용하지 않는다.[麻者不紳 執玉不麻 麻不加於采]”라는 말이 나온다. 신(紳)은 길복(吉服)의 큰 띠를 말한다.
마자수[馬髭水] 압록강(鴨綠江)의 옛 명칭. 압록강(鴨綠江)의 이칭. 혹은 요하(遼河)의 다른 이름이라 하기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압록강의 물빛이 오리의 머리 빛깔과 같이 푸른 색깔을 하고 있다고 하여 압록(鴨綠)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이나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등에는 압록강이 패수(浿水)·염난수(鹽難水)·마자수(馬訾水)·청수(靑水) 등으로 나온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현도군조(玄菟郡條)의 주(註)에 “마자수가 서북쪽으로 염난수(鹽難水)에 흘러들고, 서남쪽으로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馬訾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라는 기록이 있고,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마자수가 말갈의 백산(白山)에서 흘러나오는데, 색이 오리의 머리와 같아 압록수(鴨淥水)라고 부른다. 국내성 서쪽을 경유하여 염난수(鹽難水)와 더불어 합쳐진다.[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號鴨淥水, 歷國內城西, 與鹽難水合.]”라고 하였다.
마자여공지시[麻者女功之始] 삼베는 길쌈의 시초임. 삼베가 여자들이 길쌈으로 만든 천 가운데 가장 원초적인 것임을 강조한 말이다.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단술이 맛이 좋긴 하지만 제사 때에 현주와 명수 같은 물을 윗자리에 놓는 것은 물이 모든 맛의 근본임을 중시하려고 해서이다. 각종 화려한 무늬의 옷감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제사 때에 거친 삼베를 쓰는 것은 여자들이 하는 길쌈의 시초를 돌아보고 귀하게 여기려 해서이다.[酒醴之美 而玄酒明水之尙 貴五味之本也 黼黻文繡之美 而疏布之尙 反女功之始也]”라고 하였다.
마자재[馬子才] 송나라 때의 문인 마존(馬存)으로, 자재(子才)는 그의 자이다. 문장이 웅혼(雄渾)하고 강직(剛直)하다는 평이 있다.
마자하택거[馬子下澤車] 마자(馬子)는 마원(馬援)을 이르고, 하택거(下澤車)는 질퍽거리는 습지도 통과할 수 있는 가벼운 수레를 이른다. 후한(後漢)의 명장인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일찍이 남방(南方)인 교지(交趾)로 정벌을 나가서 적군 수천 급(級)을 참수(斬首)하고 크게 격파하여 신식후(新息侯)에 봉해졌는데, 이때 군사(軍士)들을 호궤(犒饋)하면서 부하 관속(官屬)에게 이르기를 “나의 종제(從弟) 소유(少游)가 일찍이 말하기를 ‘선비가 세상에 나서 의식(衣食)이나 해결할 만하여 하택거(下澤車)를 타고 관단마(款段馬)를 몰고 선영의 분묘(墳墓)나 잘 수호하며 조용히 지내서 향리로부터 선인(善人)이란 말만 들으면 될 것이요, 넘치는 행복을 구하는 것은 스스로 괴로울 뿐이다.[士生一世, 但取衣食裁足, 乘下澤車, 禦款段馬, 爲郡掾史, 守墳墓, 鄕里稱善人, 斯可矣, 致求盈餘, 但自苦耳.]’라고 하더니, 내가 이곳에 와서 미처 노(虜)를 멸하기 전에 장열(瘴熱)의 훈증(薰蒸)으로 인하여 솔개가 수중(水中)으로 툭툭 떨어지는 것을 쳐다보면서 내 종제가 평상시에 하던 말을 생각해 보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한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마작경[磨作鏡]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의하면, 당 현종(唐玄宗) 연간에 마조(馬祖) 도일 선사(道一禪師)가 매일 좌선(坐禪)을 하고 있으므로, 남악(南嶽) 회양 선사(懷讓禪師)가 그에게 가서 묻기를 “대덕께서는 좌선을 해서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大德坐禪圖什麽]”라고 하자, 도일 선사가 “부처가 되고자 하느니라.[圖作佛]”라고 답하였다. 회양 선사가 이에 벽돌 한 장을 가지고 가서 피암(彼庵) 앞의 돌에 갈고 있으므로, 도일 선사가 “스님은 무엇을 만드는고?[師作什麽]”라고 묻자, 회양 선사가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합니다.[磨作鏡]”라고 답하니, 도일 선사가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겠는가?[磨甎豈得成鏡耶]”라고 하므로, 회양 선사가 “좌선을 한다 해서 어찌 부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坐禪豈得作佛耶]”라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일을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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