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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정[摩頂], 마정[馬政], 마정[磨正], 마정경 즉일사귀[馬正卿 卽日辭歸]


마정[摩頂]  오른 손을 들어 머리에 얹는, 불교(佛敎)에서 수계전법(授戒傳法)을 할 때의 의식. 계사(戒師)가 수행자의 정수리를 쓰다듬고 나서 계(戒)를 내려 주는 것을 이른다. 불교에는 수기(授記) 즉 부처가 되리라는 예언을 하거나 대법(大法)을 전할 적에는 정수리를 쓰다듬는[摩頂] 관례가 있다. 계사(戒師)는 수계의식(受戒儀式)에서 모셔야 하는 삼사(三師) 중 하나로 불자가 지켜야 할 행동 규범을 일러 주는 승려이다. 불조통기(佛祖統紀) 권11에 “동파의 아들 태가 생후 네 살이 되어서도 걷지 못했다. 법사를 청해 머리를 깎고 이마를 어루만지게 했더니 며칠 만에 잘 걸을 수 있게 되었다.[坡子迨生四歲不能行. 請師落髮摩頂. 數日即善步.]”라고 하였고, 법화경(法華經) 촉루품(囑累品)에 “그때 석가모니가 법좌에서 일어나 큰 신통력을 나타내시며 오른손으로 수많은 보살마하살들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내가 한량없는 백천만억 아승기겁에 얻기 어려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닦고 익혀 지금 너희들에게 부촉하는 것이니 너희는 마땅히 일심으로 이 법을 널리 전해 이롭게 하도록 하라.’고 말하였다.釋迦牟尼佛從法座起, 現大神力, 以右手摩無量菩薩摩訶薩頂, 而作是言: 我於無量百千萬億阿僧祇劫, 作習是難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 今以付囑汝等, 汝等應當一心流布此法, 廣令增益.]”라고 한 데서 보인다.

마정[馬鄭]  마융(馬融)과 정현(鄭玄)의 병칭이다. 이들은 후한(後漢)의 대표적인 학자들로서 각각 경(經)을 주석하여 이름을 날렸다. <南史 王僧虔列傳>

마정[馬政]  관용으로 사용되는 말을 기르고 훈련하는 제반 제도. 말의 사양(飼養), 품종 개량, 번식(蕃殖), 수출입 등에 관한 국가의 행정(行政)을 통칭하여 마정이라고 한다.

마정[磨正]  옥이나 돌 따위를 갈아서 매끈하게 하는 것을 이른다.

마정경[馬正卿]  마정경(馬正卿)은 소식(蘇軾)과 종유(從遊)하던 마몽득(馬夢得)을 가리킨다. 정경(正卿)은 그의 자이다. 황주통판(黃州通判)을 지냈다. 소식이 일찍이 황주(黃州)에 폄척되었을 적에 생활이 몹시 곤궁하였는데, 마정경이 그의 어려움을 측은하게 여겨, 옛 영지(營地) 수십 무(數十畝)를 군중(郡中)에 청하여 얻어서 소식에게 농사를 짓고 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소식이 황주 서호(西湖)의 동파(東坡)에 설당(雪堂)을 짓고 수년을 이곳에서 지냈다. 소동파집(蘇東坡詩集) 권21 동파팔수(東坡八首) 맨 마지막 수에 “마생은 본래 곤궁한 선비로서, 나와 어울린 것이 어언 이십 년. 밤낮으로 나의 출세를 기원하면서, 산을 살 돈을 나눠 줄 것을 기대하였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내가 폐를 끼치면서, 그에게 이 밭을 빌려 농사를 짓고 있다오.[馬生本窮士, 從我二十年. 日夜望我貴, 求分買山錢. 我今反累君, 借耕輟茲田.]”라고 하였다.

마정경 즉일사귀[馬正卿 卽日辭歸]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전집 권44 낙생부(樂生部) 동년개궁(同年皆窮)에 “마정경은 북송 사람으로 자가 몽득(夢得)이며, 소식(蘇軾)과 동년(同年)이다. 한번은 소식이 우연히 그의 서재에 들러 별생각 없이 두보(杜甫)의 추우탄(秋雨歎) 한 편을 썼는데, 마정경이 즉시 벼슬을 버리고 떠나갔다.”라고 하였고, 동파지림(東坡志林)에 “기인(杞人) 마정경(馬正卿)은 태학정(太學正)으로 재직하였는데, 청렴하고 강직하여 학생들도 좋아하지 않았고 박사들도 그를 꺼렸다. 내가 우연히 그의 서재에 들렀을 때 두자미(杜子美)의 추우탄(秋雨嘆) 한 편을 벽 위에 적었는데, 처음부터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 그러나 마정경은 그날로 사직하고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백발이 되도록 가난하게 살면서도 절개를 지키고 있다. 마정경의 자는 몽득(夢得)이다.[杞人馬正卿作太學正, 清苦有氣節, 學生既不喜, 博士亦忌之. 余偶至其齋中, 書杜子美‘秋雨嘆’一篇壁上, 初無意也, 而正卿即日辭歸, 不復出. 至今白首窮餓, 守節如故. 正卿字夢得.]”라고 하였다. 보주두시(補注杜詩)에 “당 현종(玄宗) 때 가을에 두 달 내내 비가 내려 황제가 근심을 하자, 양 귀비의 6촌 오라비로 권력을 농단했던 양국충(楊國忠)이 벼 중에 성한 것을 가져다 바치면서 ‘비가 많이 왔지만 농사에는 해가 없습니다.[雨雖多, 不害稼也.]’라고 하였는데, 두보가 추우탄(秋雨嘆)이라는 시를 지어 간신이 득세한 세상을 개탄하고 은둔하였다.”라고 하였고, 청(淸)나라 구조오(仇兆鼇)의 두시상주(杜詩詳注)에 “당서(唐書)에, 천보 13년 가을, 장마비가 곡식을 해쳐 60일 동안 그치지 않아 황제가 근심하였다. 양국충이 벼 중에서 좋은 것을 골라 바치며 말하기를 ‘비록 비가 많이 내리기는 하였지만 곡식을 해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느낀 바가 있어 이 시[추우탄秋雨嘆]를 지었다.[唐書: 天寶十三載秋, 霖雨害稼, 六旬不止, 帝憂之. 楊國忠取禾之善者以獻, 曰:‘雨雖多, 不害稼.’ 公有感而作是詩.]”라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마정경도 당시의 정국에 상심하여 떠나간 것이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 추우탄(秋雨歎)에 “가을비에 온갖 풀들이 다 시들어 죽었는데, 뜰아래 결명초는 빛깔이 새뜻하구나. 가지 가득 붙은 잎새는 푸른 깃 일산 같고, 무수히 핀 꽃들은 황금 돈과 흡사한데, 서늘한 바람 쌀쌀히도 너에게 급히 부니, 늦은 철에 네 홀로 섰기 어려울까 두렵구나. 당상의 서생은 부질없는 백발의 몰골로, 바람 앞에서 향내 거듭 맡으며 눈물짓노라.[雨中百草秋爛死, 階下決明顔色新. 著葉滿枝翠羽蓋, 開花無數黃金錢. 涼風蕭蕭吹汝急, 恐汝後時難獨立. 堂上書生空白頭, 臨風三嗅馨香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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