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조마사[馬祖馬社] 마조(馬祖)는 성수(星宿)의 이름으로 방성(房星) 또는 천사성(天駟星)이라고도 하는데, 용마(龍馬)를 지칭한다. 주례(周禮) 하관(夏官) 교인(校人)에 “봄에 말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인 마조(馬祖)일 때에는, 망아지를 잡아서 제사를 지낸다.[春祭馬祖, 執駒.]”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注)에는 “마조는 천사(天駟)이다. 효경설에 이르기를 ‘방(房)은 용마(龍馬)이다.’라고 하였다.[馬祖, 天駟也. 孝經說曰: 房爲龍馬.]”라 하였다. 이에 대한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는 “말은 사람과 달라서 선조를 찾을 수 있으므로 제조(祭祖)라고 한 것은 천구(天駒)이다. 그러므로 효경설(孝經說)에 방(房)은 용마(龍馬)라고 한 것을 취하여 마지조(馬之祖)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사(馬社)는 말을 기르는 장소에 둔 사(社)로서 용마(用馬)·가거(駕車)에 공을 남긴 사람들을 배식(配食)한다. 이 사에 배식(配食)된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
마조상[馬祖常] 자(字)는 백용(伯庸)이다. 대대로 몽골 족 옹고부(雍古部) 혈통으로서, 아버지의 대에 광주(光州)에 이사하였다. 35세 때 향공(鄕貢), 회시(會試)에서 모두 장원, 연우(延祐) 초에 정시(廷試) 차석으로 급제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이르렀으며 문장과 시가 훌륭하였다.
마조서[媽祖嶼] 팽호도 본섬의 옛 이름이다.
마조서묘[馬潮胥廟] 춘추 시대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촉루검(屬鏤劍)으로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죽은 오자서(伍子胥)의 영혼이 전당강(錢塘江)의 물귀신이 되어 이따금 소거(素車) 백마(白馬)를 타고 물결 위에 나타나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다는 일화가 전한다. <太平廣記 卷291 伍子胥條 引 錢塘志>
마조장[磨造匠] 돌이나 쇠붙이 따위를 갈아 물건을 만드는 장인을 이른다.
마조제[馬祖祭] 마조단(馬祖壇)에서 말의 조상 천사(天駟)에게 드리는 제사이다. 마조단은 동교(東郊)의 살곶이 목장(箭串牧場) 안에 있었다. 매년 중춘(仲春) 즉 2월 중순 이후 강일(剛日)에 말의 수호신인 28수(宿)의 제4위 방성(房星)에 지내는 제사이다. <經國大典 禮典 祭禮>
마조제[馬祖祭] 말의 역질이 돌 때에 말의 수호신인 방성(房星), 즉 천사성(天駟星)에 지내는 제사이다. 마조(馬祖)는 28수(宿) 중에 말에 관한 정사를 관장하는 별자리 이름으로 방성(房星), 즉 천사성(天駟星)을 가리킨다. 주례(周禮) 하관사마(夏官司馬)에, 봄이 되면 마조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는데, 조선에서는 소사(小祀)로서 서울 동대문 밖에 마조단(馬祖壇)을 설치하고 중춘(仲春)에 길일(吉日)을 택하여 임금이 신하를 보내어 제사 지냈다.
마조주홀[馬曹拄笏] 마조(馬曹)는 말을 관장하는 관청이다. 진(晉)나라 왕자유(王子猷)가 거기장군(車騎將軍) 환충(桓沖)의 기병참군(騎兵參軍)으로 있으면서 머리는 쑥대 같고 허리띠는 풀어 헤친 채 자기 직무를 돌보지 않고 있었다. 환충이 ‘그대는 무슨 관서(官署)를 맡는가?[卿何署?]’라고 묻자 ‘무슨 관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말을 끌고 오는 것을 보니, 아마도 마조인 듯합니다.[不知何署. 時見牽馬來, 似是馬曹.]’라고 하였고, 또 ‘관서에는 모두 얼마의 말이 있는가?[官有幾馬?]’라고 하자 ‘말을 상관하지 않으니 어떻게 그 숫자를 알 수 있겠습니까?[不問馬, 何由知其數?]’라고 하였으며 ‘말이 근래 얼마나 죽었는가?[馬比死多少?]’라고 하자 ‘산 것도 모르는데 죽은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未知生, 焉知死?]’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있고, “왕자유(王子猷)가 환충(桓沖)의 참군(參軍)이 되었을 때 환충이 묻기를 ‘경은 부에 있은 지 오래이니, 이제 사무를 잘 처리하겠지?’라고 하니, 처음에는 대답하지 않다가 곧장 위를 쳐다보며 홀로 뺨을 괴더니 ‘서산에 아침 오니, 상쾌한 기운이 있군요.’라고 답하였다.[王子猷作桓車騎参軍 桓謂王曰 卿在府久 比當相料理 初不答 直高視 以手版拄颊云 西山朝來 致有爽氣]”라는 고사가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간오(簡傲)에 보인다. 참고로, 왕자유(王子猷)는 회계(會稽) 산음(山陰) 사람 왕휘지(王徽之)로 자가 자유(子猷)이다. 중국 최고의 서법가로 꼽히는 왕희지(王羲之)의 다섯째 아들이다. 재능이 출중하고 성격이 호방하였으며, 이름난 선비들을 숭상했다. 벼슬은 대사마(大司馬) 환온의 참군(參軍, 참모)을 지냈고, 몇 년 뒤 다시 환충(桓冲)의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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