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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당[漫堂], 만당시체[晩唐詩體], 만대[晩對], 만대첨앙재차거[萬代瞻仰在此擧]


만당[漫堂]  만당은 청나라 송낙(宋犖)의 호이다.

만당[晚唐]  옛날 당시(唐詩)를 시대별로 나누던 분기(分期)의 하나로, 초(初), 성(盛), 중(中), 만(晚) 4기로 나눌 때는 대화(大和) 이후를 만당이라 하고, 초(初), 성(盛), 만(晚) 3기로 나눌 때는 원화(元和) 이후를 만당이라 하였다.

만당시[晩唐詩]  만당(晩唐)은 대체로 당나라 경종(敬宗) 보력(寶曆) 원년(825)부터 애제(哀帝) 천우(天祐) 4년(907)까지인데,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두목(杜牧), 이상은(李商隱), 온정균(溫庭筠), 피일휴(皮日休), 섭이중(聶夷中), 두순학(杜荀鶴) 등을 뽑을 수 있다. 만당의 시는 한편으로는 초당 때의 유미주의적 시풍의 특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성당 후기의 사실주의적 시풍의 특성을 지니며 발전하였다.

만당시체[晩唐詩體]  만당(晩唐)의 시체(詩體). 만당은 당(唐) 나라의 말년을 이른다. 당대(唐代)의 시를 초당(初唐)·성당(盛唐)·중당(中唐)·만당(晩唐)의 4기로 구분한 하나로, 문종(文宗) 태화(太和) 이후 당말에 이르기까지 80년 동안을 가리키는데, 이때는 두목(杜牧)·이상은(李商隱)·온정균(溫庭筠) 등의 시인이 대표적으로 활동하던 시대로, 화려하고 섬세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적인 시풍이었다.

만당추수[滿塘秋水]  못에 가득 찬 가을의 맑은 물.

만대[晩對]  만대청산(晩對靑山)을 줄여 쓴 것으로, 당(唐)나라 위응물(韋應物)의 <과거에 낙방하고 양주로 돌아가는 괴광을 전송하며[送槐廣落第歸揚州]> 시에 “저물녘 청산과 작별하고[晩對靑山别]”라고 보인다. <韋蘇州集 巻4>

만대[晩對]  만대(晩對)는 만대청산(晩對靑山)을 줄여 쓴 것으로, 당(唐)나라 위응물(韋應物)의 시 송괴광낙제귀양주[送槐廣落第歸揚州]에 “저물녘 청산과 작별하고[晩對靑山别]”라고 보인다. <韋蘇州集 巻4>

만대[晩對]  저물녘에 어울림. 두보(杜甫)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에 “강이 지나는 한산의 누각이요, 성이 드높은 변경의 보루구나. 푸른 절벽 산은 저물녘에 잘 어울리고, 백제성 골은 깊이 노닐기에 알맞네.[江度寒山閣, 城高絕塞樓. 翠屛宜晩對, 白谷會深遊.]”라고 하였다.

만대불변[萬代不變]  영원(永遠)히 변(變)하지 아니함을 이른다.

만대불역[萬代不易]  영원(永遠)히 바뀌지 아니함이른다.

만대산[萬代山]  만대산(萬岱山)이라고도 쓰는데, 현재는 해남읍 외곽에 있는 금강산(金剛山)과 연결되어 있다.

만대암[晩對巖]  유장원(柳長源)의 시 희작동암이십영(戲作東巖二十詠)에“독매원 아래에 가로 누운 돌이 있으니, 매양 날이 저물 때 돌에 올라 읊조리고 휘파람 불었기에 만대라고 이름하였다.[獨梅園下, 有石橫卧, 每於日晩登石吟嘯, 因名晩對.]”라고 하였다.

만대영화[萬代榮華]  여러 대를 누리는 부귀(富貴)와 공명(功名). 여러 대를 이어 가며 누리는 영화.

만대유전[萬代遺傳]  길이길이 전하여 내려옴. 오래도록 전하여 내려감. 아주 긴 세월을 전하여 내려옴.

만대정[晩對亭]  현재는 경북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에 있다. 본래 임지면에 있던 것을 중수하면서 옮겨 왔다고 한다.

만대첨앙재차거[萬代瞻仰在此擧]  송경(宋璟)과 장열(張說)이 함께 봉각사인(鳳閣舍人)으로 재직할 때, 무후(武后)의 총신(寵臣)인 장역지(張易之)가 어사대부(御史大夫) 위원충(魏元忠)을 모함하면서 장열(張說)을 증인으로 끌어들이자, 송경(宋璟)이 장열(張說)에게 어전(御前)에서 결코 위증(僞證)하지 말도록 당부하면서 “만고(萬古)의 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는 것이 이번 일에 달려 있다.[萬代瞻仰在此擧]”라고 하였다. <通鑑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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