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덕[萬德] 제주(濟州)의 기생으로 자기 재물을 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해 살렸는데 그 일이 조정에 보고되었다. 그에게 소원을 물으니 상을 받는 것도 면천(免賤)되는 것도 원하지 않고 다만 바다를 건너 서울에 올라와 보고 그 길에 금강산을 볼 수 있기를 소원한다고 하여 소원대로 해 주라고 명하였다.
만덕사[萬德寺]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萬德山)에 있는 백련사(白蓮寺)를 가리킨다. 만덕산에 있기 때문에 만덕사(萬德寺)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도[晩途] 만년(晩年).
만도[晩稻] 늦벼. 옛날에 봄에 가물어서 수경(水耕)을 할 수 없는 경우, 마른갈이로 도종(稻種)을 심어 가꾸던 방식을 말하는데, 이 벼를 만도(晩稻)라 일컬었다. <山林經濟 卷1 治農 晩稻>
만도불로 용철고비[晩逃佛老 勇撤皐比] 만년에 불교와 노자로 도피하고, 용감하게 강론 자리를 거둠. 주희(朱熹)의 횡거선생유상찬(橫渠先生遺像贊)에 “초년에는 손무(孫武)와 오기(吳起)를 좋아하고 만년에는 불교와 노자로 피하였네. 용감하게 강론 자리를 거두니 한번 변화하여 도에 이르렀도다.[早悅孫吳 晩逃佛老 勇撤皐比 一變至道]”라고 하였다. <朱子全書 卷66 六先生畫像贊 橫渠先生> 횡거는 송(宋)나라의 유학자 장재(張載)의 호이다. 장재가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아 주역(周易)을 강(講)했는데, 사방에서 모여드는 많은 학자들 중에 정자(程子) 형제와 함께 주역(周易)을 논한 후 다음 날로 호피를 걷어치우고 제자들에게 “이정(二程)이 주역(周易)에 워낙 밝아서 내가 따를 수 없다.”라고 한 일화가 있다. <性理大全書 卷39 諸儒1> 고비(皐比)는 호랑이 가죽인데, 옛날에는 스승이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아 강학을 하였으므로 강석(講席)의 뜻으로 쓰였다.
만동[萬東] 만동(萬東)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줄임말이다. 중국(中國)의 강물과 개울은 만 번 꺾어져도 모두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에서 제후국들이 중국을 한결같이 천자의 나라로 받든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고종(高宗)이 반드시 황제에 즉위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만동[蠻峒] 중국 남방 이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만동묘[萬東廟]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일찍이 민정중(閔鼎重)이 북경(北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 네 글자를 얻어 가지고 와서 송시열(宋時烈)에게 주니, 송시열이 청주(淸州)의 화양동(華陽洞) 절벽에 이것을 새겼다. 뒤에 송시열이 죽을 때에 권상하(權尙夏)에게 이곳에 사당을 세워 의종과 신종을 제사 지내도록 하였는데, 이에 1704년(숙종30)에 권상하가 부근 유생(儒生)들과 함께 화양동에 만동묘를 짓고 제사 지냈다.
만동묘[萬東廟] 임진왜란 때에 조선(朝鮮)을 도와준 명(明)나라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사 지내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송시열(宋時烈)의 유명(遺命)으로 그의 제자 권상하(權尙夏)가 1704년(숙종30)에 충청도 괴산(槐山) 화양동(華陽洞)에 지었는데, 이 이름은 바로 선조(宣祖)의 ‘만절필동(萬折必東)’이란 성교(聖敎)에서 따온 것이다. 1725년(영조1) 12월에 의종의 어묵(御墨)을 바친 자가 있었는데, 영조는 곧 만동묘에 사액(賜額)한 숙종(肅宗)의 어묵을 돌에 새기게 하고 그 아래에 친서(親序)하고 나서 그것을 인쇄하여 송시열의 손자에게 내리고 석본(石本)을 내부(內府)에 갈무리해 두게 하였다. <英祖實錄 1年 12月 13日, 附錄 英祖大王行狀>
만동사[萬東祠] 만동묘(萬東廟)를 이른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선을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사 지내기 위해 1704년(숙종30)에 화양동(華陽洞)에 세운 만동묘(萬東廟)를 가리킨다. 인조(仁祖) 때에 송시열(宋時烈)이 명나라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글 한 폭을 받고서 이 글을 화양동 석벽(石壁)에 새겨 놓고 석벽 위에 공부하는 사당을 지었는데, 송시열이 죽을 때에 그의 제자 권상하(權尙夏)에게 이곳에 묘우(廟宇)를 지어 신종과 의종(毅宗)을 제사 지내도록 유언하였기 때문에 권상하가 유림을 동원하여 지었다.
만동사[萬東祠] 만동사(萬東祠)는 만동묘(萬東廟)로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 준 명(明)나라 신종(神宗)을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민정중(閔鼎重)이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 네 글자를 얻어 와서 송시열(宋時烈)에게 주자, 송시열이 1674년 충청도 청주(淸州) 화양동(華陽洞) 절벽에 이를 새기고 암자를 지었다. 송시열이 죽을 때 권상하(權尙夏)에게 사당을 세워 신종과 의종을 제사 지내도록 하니, 권상하는 유생들과 함께 화양동에 만동묘를 짓고 제사 지냈다. 1726년(영조2) 조정에서 여기에 토지와 노비 등을 내려 관리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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