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교[萬里橋] 사천성(四川省) 성도시(成都市) 서쪽 교외 금강(錦江)의 지류인 완화계(浣花溪)에 있는 다리이다.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비위(費褘)를 동오(東吳)로 사신으로 보낼 때 전송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비위(費褘)가 사신으로 가면서 “만 리 길이 이 다리에서부터 시작되는구나.[萬里之行始於此橋]’라고 한 데서 연유된 이름이라고 한다. 이 다리의 서쪽에 두보(杜甫)의 완화초당(浣花草堂)이 있었다. 두보(杜甫)의 시 광부(狂夫)에 “만리교의 서쪽으로 한 초당이 있으니, 백화담의 물이 바로 창랑의 물이라네.[萬里橋西一草堂, 百花潭水卽滄浪.]”라고 하였고, 또 회금수거지(懷錦水居止) 시에 “만리교 서쪽의 집이며, 백화담 북쪽의 별장이, 높은 난간은 모두 물을 마주했고, 늙은 나무는 오랜 세월 겪었도다.[萬里橋西宅, 百花潭北莊. 層軒皆面水, 老樹飽經霜.]”라고 하였고, 야망(野望) 라는 시에 “눈 덮인 서산 성채마다 방비 삼엄하고, 성 남쪽 강물 위로 만리교 걸려 있네.[西山白雪三城戍, 南浦淸江萬里橋.]”라고 하였다.
만리교서[萬里橋西] 두보(杜甫)의 시 광부(狂夫)에 “만리교 서쪽에 초당 하나 있나니, 백화담의 물이 바로 창랑이라네.[萬里橋西一草堂, 百花潭水卽滄浪.]”라고 하였고, 회금수거지(懷錦水居止) 시에 이르기를 “만리교 서쪽에 집이 있고, 백화담 북쪽에 별장 있네. 높은 난간은 모두 물을 마주했고, 늙은 나무는 오랜 세월 겪었네.[萬里橋西宅, 百花潭北莊. 層軒皆面水, 老樹飽經霜.]”라고 하였다.
만리궁철적[萬里窮轍迹] 주희(朱熹)의 시 재거감흥(齋居感興) 20수 중 제4수에 “그대여 목천자를 한번 보게나, 만리에 수레바퀴 돌아다닐 판, 만약에 기초(祈招) 시가 없었더라면 서방이 천자 자리 차지했으리.[君看穆天子 萬里窮轍迹 不有祈招詩 徐方御宸極]”라는 구절이 보인다. <晦菴集 卷4>
만리귀심[萬里歸心] 노륜(盧綸)의 시 만차악주(晩次鄂州)에 “삼상(三湘)에서 수심에 센 귀밑머리로 가을 경물을 만나고, 만리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으로 밝은 달을 바라본다. 옛 가산(家産)은 이미 전쟁으로 인해 모두 사라졌는데, 강가 전장의 북 소리 어이 다시 견디랴.[三湘愁鬢逢秋色, 萬里歸心對月明. 舊業已隨征戰盡, 更堪江上鼓鼙聲.]”라고 한 데서 보인다. 노륜(盧綸)의 고향은 포주(蒲州: 현재 산서성山西省 영제현永濟縣)이고, 당시 형초(荊楚) 지역을 여행하고 있어 거리가 매우 멀었으므로, 만리(萬里)라고 표현한 것이다.
만리능순[萬里能馴] 두보(杜甫)의 시 증위좌승(贈韋左丞)에 “지금 동쪽 바다로 들어가고자 하여, 곧 서쪽의 장안을 떠나려고 하네. 그러나 아직도 종남산이 그리워, 머리 돌려 맑은 위수 가를 바라본다오. 한 끼 밥 먹여 준 은혜도 갚으려 하거든, 더구나 대신을 떠나려 하겠는가. 백구가 너른 물결에 숨어 버리면, 만리 밖 백구를 누가 길들일 수 있으랴.[今欲東入海, 卽將西去秦. 尙憐終南山, 回首淸渭濱. 常擬報一飯, 況懷辭大臣. 白鷗沒浩蕩, 萬里誰能馴.]”라고 한 데서 보인다. 두보(杜甫)의 이 시는 곧 위 좌승에게 은근히 자신을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杜少陵詩集 卷1>
만리도비[萬里島碑]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1661년(현종2) 삼척 부사로 부임하여 세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가리킨다. 당시 삼척의 바닷가 백성들이 거센 바람과 사나운 파도에 시달리는 것을 본 허목이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전서(篆書)로 직접 써서 만리도에 세우자 바다가 잠잠해졌다고 한다. <記言 卷28 下篇 東海頌, 韓國文集叢刊 98輯>
만리동풍[萬里同風] 만리나 떨어진 먼 곳까지 같은 바람이 분다는 뜻으로, 세상(世上)이 태평(太平)함을 이르는 말. 만리(萬里)는 천하(天下)를 뜻한다. 천하가 통일(統一)되어 풍조가 같아지는 것을 만리동풍(萬里同風)이라고 한다. 선우황비(鲜于璜碑)에 “만리의 풍속이 한가지로 동화(同化)되고 다스림이 빛났다. 조정의 태위(太尉)가 불러들여 기형(機衡, 璣衡)의 일을 보좌토록 하였다. 드디어 한왕실(漢王室)에 올라 변방(邊方)에 출사(出師)하여 선우(單于)를 두려움에 떨게 하고 사이(四夷)들이 머리를 조아리게 하였다.[萬里同風, 艾用照明. 大尉聘取, 上輔機衡. 遂登漢室, 出司邊方. 單于恢畏, 四夷稽顙.]”라고 한 데서 보인다.
만리랑[萬里浪] 만리의 거센 물결. 원대한 뜻과 기백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종각(宗慤)은 남조(南朝) 송(宋)나라 때 좌위장군(左衛將軍)을 지낸 인물로, 어렸을 때 숙부 종병(宗炳)이 포부를 묻자 “장풍을 타고 만리의 거친 물결을 헤쳐 보는 것입니다.[願乘長風破萬里浪]”라고 하더니, 뒤에 과연 진무장군(振武將軍)이 되어 큰 공훈을 세우고 조양후(洮陽侯)에 봉해졌던 데서 온 말로, 거센 바람에 파도를 헤쳐 간다는 것은 흔히 남아의 웅대한 기백을 발휘하여 용감하게 전진하는 비유로 쓰인다. <宋書 卷76 宗慤列傳> 참고로,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붓을 던질 생각이 있으니, 종각의 거센 바람을 사모하노라.[有懷投筆, 慕宗慤之長風.]”라고 하였다. 또 춘추 시대 월(越)나라 대부(大夫) 범려(范蠡)가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도와서 오(吳)나라를 멸망시키고 패자(霸者)가 되게 한 뒤에 벼슬을 그만두고는 일엽편주를 타고 오호(五湖)로 나가서 성명(姓名)을 모두 바꾸고 숨어 살았던 고사가 전한다. <吳越春秋 卷10 句踐伐吳外傳>
만리뢰[萬里瀨] 남곤(南袞)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사화(士華)이고 호는 지정(止亭) 또는 지족당(知足堂)이다. 대사헌,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기묘사화 때 예조 판서로 있으면서 조광조를 비롯한 여러 선비를 모함하여 죽였다. 남곤(南袞)의 집은 삼청동(三淸洞) 깊숙이 있었다. 그 앞에는 산 개울물이 흐르고 뒤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박온(朴誾)이 집주인인 남곤을 조롱하느라고 그 시냇물을 만리뢰(萬里瀨])라 하였으니, 주인인 남곤이 벼슬하느라고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오므로, 문 앞에 있는 시내도 만리 밖에 있는 것처럼 멀고, 집 뒤에 있는 바위도 알지 못하니, 대은(大隱) 즉 숨은 것이라 하고 이름 짓기를 대은암(大隱岩)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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