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군가[萬石君家] 만석군(萬石君)의 집안. 만석군(萬石君)은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 구경(九卿)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석분(石奮)을 가리키는데, 석분의 공근(恭謹)함은 비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의 네 아들 역시 모두 효근순행(孝謹馴行)으로 각각 2천 석(石)의 관직에 이르자, 경제가 석분의 몫 2천 석까지 합쳐 모두 1만 석이 되므로 ‘만석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석분은 자손 중에 잘못을 저지른 자가 있으면 말로 잘못을 꾸짖는 대신 밥상을 대하고도 식사를 하지 않음으로써 자손들 스스로 잘못을 깨달아 고치게 했다고 한다. <史記 卷103 萬石列傳>
만석군가본불언[萬石君家本不言] 한 경제(漢景帝) 때 석분(石奮)이 구경(九卿)의 지위에 오르고, 그의 네 아들이 모두 효근순행(孝謹馴行)으로 각각 2천 석(石)의 관직에 이르자, 경제가 석분에게 만석군(萬石君)이라는 호를 내렸다. 석분(石奮)은 자손이 잘못하면 굳이 말로 꾸짖지 않고 식사를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잘못을 깨달아 고치게 했다. 이를 두고 황태후(皇太后)가 “유자(儒者)는 꾸밈이 많고 질박함이 적은데, 지금 만석군의 집안은 말하지 않고 몸소 실천한다.[儒者文多質少, 今萬石君家不言而躬行.]”라고 하였다. <史記 萬石君列傳> <漢書 卷46 石奮傳>
만석미감[萬石美堪] 한(漢) 나라 때 석분(石奮)이 그의 아들인 건(建)·갑(甲)·을(乙)·경(慶) 등 4형제와 함께 모두 공경하고 근신하기로 명망이 높았고, 또 아들 4형제와 함께 모두 벼슬이 이천 석(二千石)에 이르렀으므로, 그를 만석군이라 호칭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三>
만석분[萬石奮] 전한(前漢) 때의 만석꾼 석분(石奮)을 가리킨다. 석분과 그의 아들 석건(石建)·석갑(石甲)·석을(石乙)·석경(石慶)이 모두 매우 근신(謹愼)하였고, 모두 높은 벼슬에 올라 그들 집안의 녹봉을 다 합하면 곡식 만 석이 넘었다. <小學 善行> <漢書 卷46 石奮傳>
만석신편[萬石神鞭] 진시황(秦始皇)이 동해(東海)에 바윗돌로 징검다리를 놓아 바다를 건너가서 해가 뜨는 곳을 보려고 하자, 신인(神人)이 바위를 바다로 몰고 가면서 빨리 가지 않으면 채찍질을 하였으므로 바윗돌이 모두 피를 흘리며 붉게 변했다는 이야기가 진(晉)나라 복심(伏深)의 삼제약기(三齊略記)에 나온다.
만석인석[滿石引石] 만석(滿石)은 왕릉을 두른 면석(面石)과 우석(隅石)을 덮는 갑석(甲石)을 의미하고, 인석(引石)은 만석과 만석이 만나는 곳 위에 배치하여 만석이 밀려나지 않도록 하는 구조물이다.
만석정기[萬石亭記] 유종원(柳宗元)의 영주최중승만석정기(永州崔中丞萬石亭記)를 가리킨다. 유하동집(柳河東集)과 유종원집(柳宗元集) 권27에 실려 있다. 최중승(崔中丞)은 원화(元和) 9년(814)에 참소를 당해 영주자사(永州刺史)로 폄직된 최능(崔能)이다. 만석정(萬石亭)은 최능(崔能)이 영주(永州) 관아의 소재지인 영릉현성(零陵縣城)의 북쪽에 세운 정자이다. 이 작품은 유종원(柳宗元)이 원화(元和) 9년 겨울에 조정으로 돌아오라는 명을 받고, 그 이듬해 정월 영주(永州)를 떠나기 직전에 쓴 것이다.
만석희[曼碩戲] 개성 지방에서 음력 4월 8일에 연희되던 무언 인형극이다. 이 놀이는 개성의 명기 황진이(黃眞伊)의 미색과 교태에 미혹되어 파계하였다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조롱하기 위하여 연희되었다는 속전이 있으며, 일설에는 지족선사가 불공 비용을 만 석이나 받은 것을 욕하기 위하여 연희되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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