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소[蠻素] 당(唐) 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두 첩인 소만(小蠻)과 번소(樊素)를 이른다.
만소용가[萬艘龍舸] 만 척의 용가(龍舸). 용가(龍舸)는 용 무늬로 장식한 화려하고 큰 배이니, 수양제(隋煬帝)가 대운하를 완성한 뒤에 유람에 나설 때 꾸렸던 호화스러운 선단(船團)을 이른다. 양제(煬帝)는 운하(運河)를 뚫은 다음 용가를 타고 오가면서 놀이를 즐겼다. 이백(李白)의 시 상황서순남경가(上皇西巡南京歌)에 “비단 빨던 맑은 강이 만리를 흐르는데 구름 돛단 큰 배가 양주로 내려가네 북쪽 서울엔 비록 상림원을 자랑하지만 남경에는 도리어 산화루가 있다오.[濯錦淸江萬里流, 雲帆龍舸下揚州. 北地雖誇上林苑, 南京還有散花樓.]”라고 하였다.
만손겸익[滿損謙益]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자만하면 손해를 자초하고, 겸손하면 이익을 얻게 하니, 이것이 바로 하늘의 도이다.[滿招損, 謙受益, 時乃天道.]”라고 하였다.
만송[萬松] 여러 그루의 소나무를 이른다.
만송령[萬松嶺] 항주(杭州)에 있는 산 이름이다. 백거이(白居易)의 시 야귀(夜歸)에 “만 그루 푸른 솔이 산 위에 있고, 십 리 길 모랫둑은 달빛 속에 있네.[萬株松樹靑山上, 十里沙堤明月中.]”라고 한 데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만송원[萬松院] 대마도주(對馬島主) 평의지(平義智)의 원찰(願刹)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그가 평화를 위하여 노력한 공로를 인정하여 그가 죽은 뒤에도 매년 1척의 세견선(歲遣船)을 보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만송원송사[萬松院送使] 만송원은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가 죽은 후 대마도 종벽산(鍾碧山)에 세워진 원당(願堂)이다. 그의 몫으로 광해군 6년(1614)에 도서(圖書)가 지급되었는데 처음으로 사신을 보낸 것은 광해군 14년(1622)이었다. 이때 예조 좌랑(禮曹佐郞)에게 보내는 서계를 가져왔으며, 왜관에 머무르는 기간과 일공 등의 지급은 세견제1선 송사와 같았다.
만송원송사[萬松院送使] 팔송사(八送使)의 하나이다. 만송원은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가 죽은 후 대마도 종벽산(鍾碧山)에 세워진 원당(願堂)이다. 조선 시대 일본 각지에서 우리나라와 무역하기 위해 보내오던 배를 세견선이라고 하는데, 인조 때부터 1년에 8차례만 세견선을 보내는 것으로 제한하였다. 세견선을 보낼 때에는 사신도 함께 보냈는데, 이들을 팔송사라고 하였다. 팔송사는 제1선이 일송사(一送使), 제2선이 이송사(二送使), 제3선이 삼송사(三送使), 제4선에서 제17선까지가 사송사(四送使), 일특송선(一特送船)에서 삼특송선(三特送船)까지가 오송사(五送使), 부특송선(副特送船)이 육송사(六送使), 만송원송사가 칠송사(七送使), 이정암사(以酊菴使)가 팔송사이다.
만송정[萬松亭] 소식(蘇軾)의 동파집(東坡集) 권11에 만송정(萬松亭)에서 지은 만송정(萬松亭)이라는 시가 있는데, 그 서문에 “마성 현령(麻城縣令) 장의(張毅)가 길가에 수많은 소나무를 심어 길 가는 자들을 쉬게 하고 또 정자의 이름을 만송정이라 하였는데, 그가 떠난 지 10년이 못 되어 남아 있는 소나무가 3, 4할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나는 그의 뜻을 계승하지 못함을 서글퍼해서 이 시를 지었다.[麻城縣令張毅, 植萬松於道周以芘行者, 且以名其亭. 去未十年, 而松之存者十不及三四. 傷來者之不嗣其意也. 故作是詩.]”라고 하였고, 그 시에 “십 년 계책 솔 심은 건 백 년을 생각한 것인데, 덕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내 생각 도와줄 이가 없네.[十年栽松百年規, 好德無人助我儀.]”라 하고, 그 자주(自注)에 “일 년의 계책으로는 곡식을 심는 것이요, 십 년의 계책은 나무를 심는 것이며, 백년의 계획으로는 덕을 심는 것이다.[一年之計, 樹之以谷 ; 十年之計, 樹之以木 ; 百年之計, 樹之以德.]”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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