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사[萬壽寺] 본래는 당나라 때 세워진 취슬사(聚瑟寺)인데, 명나라 만력 5년(1577)에 만수사로 개칭되었다. 청나라 때에는 강희제, 건륭제, 광서제 등에 의해 여러 차례 중건되어 황실의 사찰로 중시되었다.
만수산[萬壽山] 개성에 있는 산이다.
만수산[萬壽山] 중국 연경(燕京 : 북경北京)에는 만수산(萬壽山)이란 이름을 지닌 두 개의 야트막한 산이 있었다. 그 첫 번째는 곤명호(昆明湖) 북쪽에 있는, 흔히 서산(西山)이라 불리는 산이다. 원래 이름은 옹산(甕山)인데 건륭 연간에 만수산으로 바꾸었고 지금까지 이 이름으로 불린다. 다른 하나는 숭정 황제(崇禎皇帝)가 목을 맨 경산(景山)의 옛 이름이 바로 만수산이다. 순치 연간에 이름을 바꾸기 전까지 만수산으로 불렸다. 이재흡(李在洽)의 부연일기(赴燕日記) 만불사(萬佛寺)에 “궁성의 정북문은 신무문이고 그 맞은편 문은 북상문이다. 북상문 안쪽은 곧 경산으로 만수산이라고도 하는데, 만든 산이라고 한다.[宮城正北門, 卽神武門, 而其對門, 卽北上門. 門內, 卽景山, 或萬壽山, 是造山云.]”라는 구절이 보인다.
만수산[萬壽山] 연경에서 서쪽으로 40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산 이름으로, 서산(西山)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명나라 숭정제(崇禎帝)가 청나라의 핍박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蘮山紀程 卷5 山川>
만수산[萬壽山] 자금성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의 맞은편에 있는 야트막한 산으로 청나라 순치(順治) 12년(1655)에 경산(景山)으로 개칭한 후 지금까지 경산으로 불린다. 숭정 황제가 목은 맨 곳은 아직도 남아 있다.
만수산[萬壽山] 현재의 북경 이화원(頤和園) 곤명호(昆明湖) 가에 있는 산이다. 원나라 때 보물이 가득 든 돌 항아리가 나왔다 하여 옹산(甕山), 호수는 옹산박(甕山泊)이라 불렸다. 건륭제는 1750년(건륭15)에 황태후의 회갑을 축하하여, 황실의 원림(園林)을 조성하면서 산의 이름을 만수산으로 고쳤다.
만수산호[萬壽山呼] 만수산호(萬壽山呼)는 ‘산호만세(山呼萬歲)’ 혹은 ‘숭호만세(嵩呼萬歲)’와 같은 말로, 중국 한(漢)나라의 무제(漢武帝)가 숭산(嵩山)에 올라갔을 때 어디선가 만세 소리가 세 번 들려왔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漢書 卷6 武帝紀>
만수상유[晩收桑楡] 만년에 공적을 거둠. 후한(後漢) 때의 장수인 풍이(馮異)가 적미(赤眉)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다가 처음 싸움에서 대패하고, 얼마 뒤에 다시 군사를 정비하여 적미의 군대를 격파하였는데, 황제가 친히 글을 내려 위로하기를 “처음에는 회계에서 깃을 접었으나 나중에는 민지에서 떨쳐 비상하니, ‘동우에 잃었다가 상유에 수습하였다.’라고 할 만하다.[始雖垂翅回谿, 終能奮翼黽池, 可謂失之東隅, 收之桑榆.]”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동우(東隅)는 동쪽 모퉁이로 해가 뜨는 곳인데 젊은 시절을 가리키고, 상유(桑楡)는 뽕나무와 느릅나무로 지는 해의 그림자가 이 나무의 끝에 남아 있다 하여 해가 지는 곳인데 만년을 가리킨다. <後漢書 卷47 馮異列傳>
만수성절[萬壽聖節] 황제(皇帝)의 탄신일을 성절(聖節)이라 하며 그 축하하는 말로서 만수(萬壽)라는 말을 앞에 더 붙인 것이다. 원래 중국 황제의 생일을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1897년(광무1)에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명을 바꾸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이후로 고종황제의 생일인 음력 7월 25일을 만수성절이라고 불렀다.
만수연[萬壽宴] 천자(天子)의 생일잔치를 이른다.
만수요청야왕쟁[挽須聊聽野王箏] 북송(北宋) 위태(魏泰)의 시 형문별장천각(荊門別張天覺)에 “갈바람 속 먼 길 와서 천각을 보니, 생각대로 차고 맑게 자리 비추네. 주공은 비 맞고 돌아와 수레를 탔고, 사안은 감회 젖어 야왕 노래 들었네.[秋風十驛望台星, 想見氷壺照座淸. 零雨已回公旦駕, 挽須聊聽野王箏.]”라고 한 데서 보이는 구절로, 동진(東晉)의 재상 사안(謝安)과 음악가 환이(桓伊)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사안은 만년에 소인배들의 참언으로 효무제의 미움을 받았다. 환이는 어릴 때의 자(字)가 야왕(野王)으로 음악에 능했다. 하루는 효무제가 환이를 주연에 불렀고 대신 사안도 자리에 있었다. 환이는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조식(曹植)의 원시(怨詩)를 노래로 불러 사안의 무고를 변론하였다. 사안은 눈물을 흘렸고 자리를 뜰 때 환이에게 깊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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