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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역에 대처하고 빈궁을 다스리는 방법 <圍爐夜話위로야화>


안자의 남의 잘못을 따지지 않음과

맹자의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함은

바로 어진이가 횡역에 대처하는 방법이요

자공의 가난함에도 아첨하지 않음과

원헌의 비가 새는 방에 앉아 거문고 탐은

바로 어진이가 빈궁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顏子之不校,  孟子之自反,  是賢人處橫逆之方.
안자지불교,  맹자지자반,  시현인처횡역지방.
子貢之無諂,  原思之坐弦,  是賢人守貧窮之法.
자공지무첨,  원사지좌현,  시현인수빈궁지법.

<圍爐夜話위로야화>


  • 안자[顔子]  복성안자(復聖顔子). 공자(孔子)의 수제자 안회(顔回)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이름은 회(回)이고 자는 자연(子淵)인데 통상 안연(顔淵)으로 불린다. 노(魯)나라 곡부(曲阜) 출신이다. 공자보다 30세 연소하였으며 가장 촉망받던 제자였는데, 29세에 백발이 되었고 32세에 공자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후대 사람들은 그를 높여 안자(顔子)라 칭하고 복성(復聖)으로 추앙하였다. 원(元)나라 문종(文宗) 때 연국복성공(兗國復聖公)으로 추증되었고, 명(明)나라 세종(世宗) 때 복성공(復聖公)으로 추봉되었다. 학문을 좋아했으며, 집이 가난했으나 이를 괴로워하지 않고 안빈낙도(安貧樂道)했으며, 무슨 일에도 성내지 않았으며 잘못은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다 한다.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저술이나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으나 논어(論語)에 안연편(顔淵編)이 있고, 그 밖에 몇몇 서적에도 그를 현자(賢者)와 호학자(好學者)로서 덕행(德行)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전하고 있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공자가 이르기를 “안회는 그 마음이 석 달을 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나머지는 날로 달로 거기에 이를 따름이다.[回也 其心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라고 하였고,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공자가 이르기를 “내가 안회와 이야기를 나눔에 하루 종일 내 말을 어기지 않아 바보 같아 보였으나 물러난 뒤에 그가 하는 것을 보니 배운 대로 잘 따랐다. 안회는 바보가 아니었다.[吾與回言, 終日不違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라고 하였고,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안연이 죽자 공자가 “아!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구나!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구나![噫 天喪予 天喪予]”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이루하(離婁下)에 “안회가 난세에 누추한 골목에 있는 집에서 대나무 그릇에 밥을 담아 먹고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는 것을 즐기며 바꾸려 하지 않자 공자가 안회를 어질다고 칭찬하였다.[顔子當亂世, 居於陋巷, 一簞食, 一瓢飮. 人不堪其憂, 顔子不改其樂, 孔子賢之.]”라고 하였다. 또, 송유(宋儒) 주돈이(周敦頤)는 통서(通書) 권10에 “안연이 배웠던 바를 배워 이들을 능가하면 바로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이요, 제대로 따라가기만 해도 현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學顔子之所學, 過則聖, 及則賢.]”라고 하였다.
  • 불교[不校]  불계교(不計較). 서로 견주어 따져 보고 살피지 않음. 따지지 않다. 보복하지 않다. 남이 나에게 잘못하더라도 그의 잘못을 따져 묻지 않음을 이른다. 논어(論語) 태백(泰伯)에서 증자(曾子)가 “능하면서 능하지 못한 이에게 물으며, 학식이 많으면서 적은 이에게 물으며,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기고, 가득해도 빈 것처럼 여기며, 자신에게 잘못을 범하여도 따지지 않는 것, 옛적에 내 벗이 일찍이 이 일에 종사하였다.[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 昔者吾友嘗從事於斯矣.]”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벗을 주희(朱熹)는 주(注)에서 안자(顔子)라고 하였다. 불교(不較).
  • 맹자[孟子]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로 이름은 맹가(孟軻)이고, 자(字)는 자여(子輿)·자거(子車)·자거(子居) 등이 전하나 정확하지 않다. 노(魯)나라와 가까운 추(鄒)나라 출신으로 자사(子思)를 사숙하였다. 그는 공자(孔子)의 사상 특히 인의(仁義)의 도(道)를 계승하여 인(仁)·의(義)·예(禮)·지(智)라는 네 가지 도덕 실체 곧 사덕(四德)을 발전시켜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으며, 인의(仁義)의 정치(政治)를 권하였다. 당시 제후들은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인 합종연횡(合縱連橫)을 환영했으나, 그는 인의(仁義)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장하며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성선설(性善說), 왕도정치(王道政治), 민의(民意)에 근본한 혁명론(革命論) 등을 주장하며 공자사상(孔子思想)의 전통을 계승했다. 유학(儒學)의 정통으로 숭앙되며, 원나라 문종 때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으로 추증되었고, 명나라 세종 때 아성공(亞聖公)으로 추봉되었다. 그의 언행을 제자가 기록한 맹자(孟子)는 유가 경전의 하나로, 송대(宋代) 이후 사서(四書)의 하나로 칭해졌다.
  • 맹자[孟子]  전국 시대의 유가 사상가인 맹가(孟軻)의 언행과 그가 당시 사람들이나 제자들과 문답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대체로 맹자의 문인인 만장(萬章)과 공손추(公孫丑) 등이 중심이 되어 기술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모두 7편이지만,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11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조기(趙岐)는 제사(題辭)에서 외서(外書) 4편[성선(性善)·변문(辯文)·설효경(說孝經)·위정(爲政)]이 있지만 글의 뜻이 깊지 못한 것이 내편(內篇)과는 딴판이어서 진본이 아닌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조기가 맹자장구(孟子章句)를 엮으며 7편만을 주석하였고, 그것이 세상에 전해지면서 7편으로 정착되었다.
  • 자반[自反]  자기의 행위 등을 스스로 돌아봄.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 등을 스스로 반성함. 자성(自省)하다. 스스로 반성하다. 원상태를 회복하다. 참고로, 맹자(孟子) 공손추상(公孫丑 上)에 증자(曾子)가 용기를 좋아하는 자양(子襄)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용기를 좋아하는가? 내 일찍이 큰 용기를 부자에게 들었으니, 스스로 돌이켜 보아 곧지 못하면 비록 미천한 사람이라도 내 그를 두렵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스스로 돌이켜 보아 곧다면 비록 천만 사람이 앞에 있더라도 내가 가서 대적할 수 있다.[子好勇乎? 吾嘗聞大勇於夫子矣, 自反而不縮, 雖褐寬博, 吾不悴焉? 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고 하였고,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자신을 대하기를 난폭한 행동으로써 하면, 군자는 반드시 스스로 돌이켜 내 반드시 인(仁)하지 못하며 내 반드시 예가 없는가보다. 이러한 일이 어찌 이를 수 있겠는가 한다. 그 스스로 돌이켜 인하였으며 스스로 돌이켜 예가 있었는데도, 그 난폭한 행동이 전과 같으면 군자는 반드시 스스로 돌이켜 내 반드시 성실하지 못한가보다 한다. 스스로 돌이켜 성실하였으되, 그 난폭한 행동이 전과 같다면 군자는 말하기를 ‘이 또한 망인일 따름이다.’라 하나니 이와 같다면 금수와 어찌 구별하겠는가. 금수에게 또 무엇을 꾸짖을 것이 있겠는가.[有人於此, 其待我以橫逆, 則君子必自反也, 我必不仁也, 必無禮也. 此物, 奚宜至哉? 其自反而仁矣, 自反而有禮矣, 其橫逆, 由是也, 君子必自反也, 我必不忠, 自反而忠矣, 其橫逆, 由是也, 君子曰: 此亦妄人也已矣, 如此, 則與禽獸奚擇哉? 於禽獸, 又何難焉?]”라고 하였다.
  • 현인[賢人]  현자(賢者). 어진사람. 덕행의 뛰어남이 성인(聖人)다음 가는 사람. 어질고 지혜롭기가 성인에 견줄 만큼 뛰어난 사람.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의 다음 가는 사람. 불교에서 견도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악에서 벗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 참고로, 주역(周易)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쉬우면 알기 쉽고 간략하면 따르기 쉬우며, 알기 쉬우면 친함이 있고 따르기 쉬우면 공(功)이 있으며, 친함이 있으면 오래할 수 있고 공(功)이 있으면 크게 할 수 있으며, 오래할 수 있으면 현인(賢人)의 덕(德)이요, 크게 할 수 있으면 현인(賢人)의 업(業)이다.[易則易知, 簡則易從, 易知則有親, 易從則有功, 有親則可久, 有功則可大, 可久則賢人之德, 可大則賢人之業.]”라고 하였다.
  • 횡역[橫逆]  떳떳한 이치(理致)와 도리에 어그러짐. 일이 어긋나서 역경에 처함. 횡포한 행위. 무리한 처사. 상리에 어긋난 짓을 함. 강포(强暴)하여 이치를 거스르는 것. 횡포하고 억지스럽다. 갑작스럽게 기운이 역상(逆上)하는 증상. 횡역(橫逆)은 강포(强暴)하여 이치에 따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가 나에게 횡역(橫逆)하게 대한다면 군자는 반드시 스스로 반성하기를 ‘내가 필시 그에게 불인하게 대했을 것이며, 내가 필시 그에게 무례하게 대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일이 어찌 이를 수 있겠는가.’라고 할 것이다. 스스로 반성해 보아도 인하게 대했고 스스로 반성해 보아도 예의가 있었는데 그가 나에게 이렇게 횡역하게 대한 것이라면 군자는 반드시 스스로 반성하기를 ‘내가 필시 성의를 다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스스로 반성해 보아도 성의를 다하였는데 그가 나에게 이렇게 횡역하게 대한 것이라면 그제야 군자는 ‘이 사람은 망녕된 사람이다.’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다면 금수(禽獸)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금수를 상대로 다시 무엇을 따진단 말인가.[有人於此 其待我以橫逆 則君子必自反也 我必不仁也 必無禮也 此物奚宜至哉 其自反而仁矣 自反而有禮矣 其橫逆由是也 君子必自反也 我必不忠 自反而忠矣 其橫逆由是也 君子曰 此亦妄人也已矣 如此則與禽獸奚擇哉 於禽獸又何難焉]”라고 하였다.
  • 자공[子貢]  공자(孔子)의 제자 단목사(端木賜)의 자(字)이다.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 사람으로,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의 학자이다. 위(衛)나라 사람으로 성(姓)은 단목(端木), 이름은 사(賜), 자공(子貢: 子贛)은 그의 자(字)이다. 주로 자(字)로 통한다. 貢(공)은 본래 贛(공)으로 썼다. 언변에 뛰어나 공문사과(孔門四科)에 언어(言語)로 일컬어졌다. 화식(貨殖)에 뛰어나 공자의 제자 중에 제일의 부자로서 유상(儒商)의 시조라 불리며, 정치(政治)에 뛰어나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의 재상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제(齊)나라가 노(魯)나라를 치려고 할 때 공자의 허락을 받고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를 설득하여 노나라를 구함과 동시에 월을 패왕(覇王)으로 하여 네 나라의 세력 관계에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이재가(理財家)로서도 알려져 공문의 번영은 그의 경제적 원조에 의한 바가 컸다고 한다. 공자가 죽은 뒤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에 가서 벼슬하다가 제나라에서 죽었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자공이 사람을 비교하니,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사는 어진가 보다. 나는 그럴 겨를이 없노라.’라고 하였다.[子貢方人. 子曰: 賜也, 賢乎哉, 夫我卽不暇.]”라고 보이고, 사기(史記) 권129 화식열전(貨殖列傳)에 “자공이 공자에게 배우고 나서 조(曹)나라와 노(魯)나라 사이에서 장사를 하여 공자 제자 70명 가운데 가장 부유하였다. 수십 대의 수레와 후한 예물을 가지고 제후들에게 사신으로 가니, 그가 이르는 나라의 임금들마다 너나없이 대등하게 예우하였다. 공자가 천하에 이름이 알려진 것은 대부분 자공이 선양한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 무첨[無諂]  아첨하지 않음. 참고로, 논어(論語) 학이(學而)에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는 사람은 어떠합니까?[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라고 묻자, 공자가 이르기를 “좋기는 하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기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라고 한 데서 보이고, 예기(禮記) 소의(少儀)에 “남의 신하된 자는 임금의 잘못을 간하되 결코 비방하지 않으며 몸을 피하여 도망치되 미워하지 않으며, 덕을 칭찬하되 아첨하지 않으며, 임금의 잘못을 간하되 교만하지 않는다.[爲人臣下者有諫而無訕; 有亡而無疾; 頌而無讇; 諫而無驕.]”라고 한 데서 보인다.
  • 원사[原思]  원사(原思)는 공자(孔子)의 제자인 원헌(原憲)으로, 자(字)가 자사(子思)이므로 원사(原思)라고도 불렀다. 가난하게 살았으나 뜻이 굳고 학문을 좋아하여, 안빈낙도(安貧樂道)하였다. 청고(淸高)하고 빈한(貧寒)하게 사는 선비의 대명사로 쓰인다. 공자가 노(魯) 나라 사구(司寇)로 있을 때에 제자인 원사(原思)를 가신(家臣)으로 삼고서 봉급으로 곡식을 주자 원사가 굳이 사양하면서 청고한 자세를 보였다는 이야기가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나오고 “호승심(好勝心)과 자긍심(自矜心)과 원망하는 마음과 욕심내는 마음이 행해지지 않게 하면 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克伐怨欲不行焉 可以爲仁矣]”라는 원헌(原憲)의 자부심 섞인 질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다고 할 수는 있지만, 인인지는 알지 못하겠다.[可以爲難矣 仁則吾不知也]”고 공자가 대답한 말이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나온다. 또,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원헌(原憲)이 노나라에 살았는데 사방이 흙벽인 작은 집은 지붕에서 풀이 자라고 대문은 헐거웠으며 뽕나무줄기로 문지방을 만들었다. 깨진 항아리를 박아 창문을 낸 방 두 개는 칡으로 얼기설기 막아두었는데 천장에서는 물이 새고 방바닥은 축축한데도 원헌은 단정하게 앉아 금을 뜯으며 노래하였다. 자공이 안에는 보라색 비단으로 바깥에는 흰 비단으로 장식한 큰 수레를 타고 왔는데 골목이 좁아 수레가 들어갈 수 없어서 걸어서 원헌을 보러 갔다. 원헌이 흰머리가 드러난 모자를 쓰고 헐렁한 신발을 신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문에 나와 자공을 맞았다. 자공이 ‘아이고! 선생 어디가 편찮으시오?’라고 물으니, 원헌이 ‘난 재산이 없는 것을 가난하다 하고, 배웠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병이라고 들었소. 지금 나는 가난한 것이지 병든 것이 아니라오.’라고 하니, 자공이 우물쭈물 뒷걸음질을 치면서 부끄러운 낯빛을 보였다. 원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저 세상에 아부하고, 자기와 친한 사람들하고만 어울리고, 남에게 내세우기 위해 학문을 하고, 자기를 위해 가르치며, 인의를 팔아 못된 짓을 하고, 간특한 짓을 하고, 수레나 말에 장식을 하는 것은 이 사람 헌이 차마 하지 못하는 짓이라오.’라고 하였다.[原憲居魯, 環堵之室, 茨以生草; 蓬戶不完, 桑以爲樞; 以甕牖二室, 褐以爲塞; 上漏下濕, 匡坐而弦. 子貢乘大馬, 中紺而表素, 軒車不容巷, 往見原憲. 原憲華, 冠縱履, 杖藜而應門. 子貢曰: 嘻! 先生何病? 原憲應之曰: 憲聞之, 無財謂之貧, 學而不能行謂之病. 今憲, 貧也, 非病也. 子貢逡巡而有愧色. 原憲笑曰: 夫希世而行, 比周而友, 學以爲人, 敎以爲己, 仁義之慝, 輿馬之飾, 憲不忍爲也.]”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 원헌[原憲]  공자(孔子)의 제자로 자는 자사(子思), 또는 원사(原思)이다. 청고(淸高)하고 빈한(貧寒)하게 사는 선비의 대명사이다. 춘추시대 송나라 출신이다. 평생 안빈낙도하며 세상에 영합하지 않았다. 공자가 노(魯)나라 사구(司寇)를 지낼 때 가재(家宰)를 맡은 바 있다. 공자 사후 위(衛)나라에 은거하였다. 논어(論語) 헌문(憲問)편 제1장의 주인공이다. 논어에는 자(字)를 써서 원사(原思)라고 기록한 부분도 있다. 송나라 진종 때 임성후(任城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선현원자(先賢愿子)로 칭해졌다. 한시외전(韓詩外傳) 권1에 “원헌(原憲)은 노(魯)나라에 살았는데, 조그마한 집은 명아주로 이은 지붕에 쑥을 엮어 만든 문과 깨진 항아리로 만든 창문으로 이루어졌고, 뽕나무 서까래에 지도리도 없이 지붕은 새고 바닥은 축축하였다. 그는 여기에 똑바로 앉아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 자공(子貢)이 그를 만나러 갔더니, 원헌(原憲)은 닥나무 갓에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문에 마중 나왔는데, 갓을 바로잡자 갓끈이 끊어졌고 옷자락을 털자 팔꿈치가 나왔으며, 신을 신자 발꿈치가 터져 나왔다. 자공(子貢)이 ‘그대는 무슨 병이라도 들었습니까?’라고 하자, 원헌(原憲)은 쳐다보면서 응답하기를 ‘저는 가난한 것이지 병든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 원헌[原憲]  원헌(原憲)은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으로, 송(宋)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자(字)는 자사(子思) 혹은 원사(原思)라고도 한다. 공자(孔子)의 제자로 가난하면서도 도(道)를 즐겼다. 공자가 노(魯)나라 사구(司寇)로 있을 때 읍재(邑宰)를 지냈으며, 공자가 죽자 위(衛)나라로 물러나 숨어 지냈다. 공자의 제자는 간록파(干祿派), 경세파(經世派), 욕풍파(浴風派)로 나누어볼 수 있으며, 이중 욕풍파(浴風派)에 속하여, 장자(莊子)와 통한다. 사기(史記) 권124 유협열전(遊俠列傳) 서(序)에 “계차(季次)와 원헌(原憲)과 같은 이는 여항의 사람이다. 독서를 하고 홀로 군자의 덕을 행할 뜻을 품어 당세에 구차하게 합하지 않는 것을 의로 삼으니 당세에서 또한 비웃었다. 그러므로 계차와 원헌이 종신토록 가난한 집에서 살고 거친 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어도 싫어하지 않았다.[及若季次·原憲, 閭巷人也. 讀書懷獨行君子之德, 義不苟合當世, 當世亦笑之. 故季次·原憲終身空室蓬戶, 褐衣疏食不厭.]”라고 하였고, 장자(莊子) 제28편 양왕(讓王)에 “공자(孔子)의 제자 원헌(原憲)이 노(魯)나라에서 움집 같은 오두막에서 가난하게 살 적에 자공(子貢)이 안은 붉고 겉은 흰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골목길에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높고 큰 수레를 타고[中紺而表素, 軒車不容巷.] 찾아가 그의 누추한 행색과 거처를 보고 ‘아, 선생은 어찌하여 이처럼 괴롭게 사십니까?[嘻! 先生何病.]’라고 하였다. 이에 원헌은 말하기를 ‘제가 들은 바로는,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하다 이르고, 배우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괴롭다고 한답니다. 지금 저는 가난할 뿐 괴롭지는 않습니다.[憲聞之, 無財謂之貧, 學而不能行謂之病, 今憲貧也, 非病也.]’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 좌현[坐弦]  광좌이현(匡坐而弦) 똑바로 앉아서 거문고를 탐. 장자(莊子) 제28편 양왕(讓王)에 공자(孔子)의 제자 원헌(原憲)의 생활에 대하여 “원헌(原憲)이 노(魯)나라에 살고 있었다. 그 집은 상하 사방이 10척(1丈)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집인데다 지붕은 푸른 풀로 이었으며 쑥 풀을 묶어 만든 방문도 완전치 않은데, 뽕나무 가지를 깎아 지도리로 삼고 밑 빠진 항아리를 창으로 삼은 두 방을 거친 갈포로 막았다. 게다가 위에서 비가 새어 아래 바닥은 축축한데, 원헌은 그 가운데에 똑바로 앉아서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原憲居魯, 環堵之室, 茨以生草, 蓬戶不完, 桑以爲樞, 甕牖二室, 褐以爲塞. 上漏下濕, 匡坐而弦.]”라고 하였다.

【譯文】 處橫逆而不校,  守貧窮而坐弦.
遇到有人冒犯時,  顏淵不與人計較,  孟子則自我反省,  這是君子在遇人蠻橫不講理時的自處之道.  在貧賤時,  子貢不去阿諛富者,  子思則依然彈琴自娛,  完全不把貧困放在心上,  這是君子在貧窮中仍能自守的方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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