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문공(晉文公)이 구계(咎季)를 찾아가 만나봤는데, 그 집의 사당이 서쪽 담장에 붙어 있었다.
이를 보고 문공이 말하였다.
“담 서쪽에는 누가 살고 있습니까?”
구계가 대답하였다.
“임금님의 늙은 백성이 살고 있습니다.”
문공이 말하였다.
“집을 서쪽으로 좀 더 넓혀 지으시오.”
구계가 대답하였다.
“신의 충성은 임금님의 늙은 백성이 있는 힘을 다하는 것보다 못하고, 그 집은 담이 무너졌는데도 수리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문공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수리조차 못한단 말입니까?”
구계가 대답하였다.
“하루라도 농사일을 하지 않으면 100일을 굶기 때문입니다.”
문공이 나와서 이를 수행원에게 알리자, 그 수행원이 수레의 뒤쪽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이렇게 말하였다.
“서경(書經) 여형(呂刑)에 ‘한 사람에게 즐거운 일이 있으면 만백성이 그 덕을 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임금의 총명하심은 여러 신하들의 복입니다. 그러니 온 나라에 ‘궁실을 과도히 크게 지어 남의 집을 방해하지 말며, 나라의 건축공사를 농한기에 맞춰 하여 농사일 할 때를 빼앗지 말라.’라고 명령을 내리십시오.”
【설원 : 건본】
文公見咎季, 其廟傅於西牆, 公曰: “孰處而西?” 對曰: “君之老臣也.” 公曰: “西益而宅.” 對曰: “臣之忠, 不如老臣之力, 其牆壞而不築.” 公曰: “何不築?” 對曰: “一日不稼, 百日不食.” 公出而告之僕, 僕頓首於軫曰: “呂刑云: ‘一人有慶, 兆民賴之.’ 君之明, 群臣之福也, 乃令於國曰 : 毋淫宮室, 以妨人宅, 板築以時, 無奪農功.” <說苑 : 建本>
- 구계[咎季/臼季] 서신(臼季). 춘추시대 진(晉)나라 대부(大夫)로, 성(姓)은 서(胥), 이름은 신(臣)이다. 식읍(食邑)이 구(臼)이고, 자(字)가 계(季)이기 때문에 구계(臼季), 또는 구계(咎季)라고 하며, 사공(司空)을 지내 사공계자(司空季子)라고도 한다. 진 문공(晉文公: 중이重耳)이 망명 생활을 할 때 수행하였고, 성복(城濮)의 전투에서 하군좌(下軍佐)가 되어 전공을 세웠다. <春秋左氏傳 僖公 28·33년, 文公 元年> <國語 晉語 4·5>
- 여형[呂刑] 여형(呂刑)은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편명으로, 그 내용은 고대의 형정(刑政)에 관한 것이다. 목왕(穆王)이 여후(呂侯)를 사구(司寇)로 삼은 뒤에 형벌에 대해 가르쳐 사방(四方)을 다스리라고 명하였는데, 사관(史官)이 그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여후(呂侯)가 주 목왕(穆王)의 명을 받고 하우(夏禹) 시대의 속형(贖刑) 제도를 본받으면서도 좀 더 가벼운 쪽으로 개편하여 포고한 형법이다. 주(周) 나라 제도에 형벌이 모두 2천 5백 가지였는데, 목왕(穆王)이 여후(呂侯)에게 명하여 형법을 3천 가지로 증가시켰다. 예기(禮記)의 표기(表記)와 치의(緇衣), 효경(孝經)의 천자장(天子章), 상서대전(尙書大傳)과 사기(史記) 등에서는 모두 이 편을 보형(甫刑)으로 적고 있다. 거기에 “다섯 가지 형벌을 공경하여 강(剛)·유(柔)·정직(正直)의 세 가지 덕을 이루면 나 한 사람이 경사가 있을 것이며 백성들이 힘입어 그 편안함이 영원할 것이다.[惟敬五刑, 以成三德, 一人有慶, 兆民賴之, 其寧惟永.]”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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