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 관아에서 벽돌 옮긴 도간의
그 정성과 부지런함은 따라 할 만하나
전투 중에 별장에서 바둑을 둔 사안의
그 침착함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陶侃運甓官齋, 其精勤可企而及也.
도간운벽관재, 기정근가기이급야.
謝安圍棋別墅, 其鎭定非學而能也.
사안위기별서, 기진정비학이능야.
<圍爐夜話위로야화>
- 도간[陶侃] 진(晉)나라 때 파양(鄱陽) 사람으로 민제(愍帝)·원제(元帝)·성제(成帝) 때 무신(武臣)으로, 자는 사행(士行), 시호는 환(桓)이다. 어려서 고아로 가난하였으나, 심양현리(尋陽縣吏)로 있다가 효렴(孝廉)을 거쳐 광주(廣州)·형주(荊州)의 자사(刺史)를 지내고 시중(侍中)·태위(太尉)·도독교광녕칠주제군사(都督交廣寧七州諸郡事)를 거쳐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영가(永嘉)의 난 때 무창(武昌)을 지켜 공을 세웠고, 명제(明帝) 때는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으로 왕돈의 반란과 소준(蘇峻)의 난을 평정하여, 벼슬이 시중 태위(侍中太尉)에 이르렀으며 장사군공(長沙郡公)에 봉해졌다. 도연명(陶淵明)의 증조부이다. 진중흥서(晉中興書)에서 “도간(陶侃)이 형주(荊州)를 다스릴 때 좌리(佐吏)들의 박혁(博奕)놀이 도구들을 보더니 강에다 던져버리고는 ‘바둑은 요(堯)·순(舜) 임금이 어리석은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것이었고, 박(博)은 은(殷)의 주(紂)임금이 만든 것이다. 그대들은 나라의 인재들인데 어찌하여 이런 것을 하는가?’라고 말했다.[陶侃爲荊州, 見佐史博奕, 具投之於江曰, 圍棊堯舜以敎愚子, 博殷紂所造, 諸君並國器, 何以此爲.]”라고 하였다. 또, 그가 광주 자사(廣州刺史)로 재임 중에, 고을을 다스리는 일이 한가할 때면 매일 아침에 벽돌 100장을 집 안에서 밖으로 운반하고, 저녁에는 다시 밖에서 안으로 운반하면서, 신체를 단련하고 뜻을 가다듬곤 하였는데, 누가 그 까닭을 묻자 “내가 바야흐로 중원의 통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데, 너무 한가하게 지내다 보면 그 중한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런다.[吾方致力中原, 過爾優逸, 恐不堪事.]”라고 답변한 고사가 진서(晉書) 권66 도간열전(陶侃列傳)에 전한다.
- 도간운벽[陶侃運甓] 도간(陶侃)은 진(晉)나라 여강(廬江) 심양(潯陽) 사람이다. 자(字)는 사행(士行)이고, 봉호는 장사군공(長沙郡公)이다. 도잠(陶潛)의 증조부이다. 벼슬은 광주자사(廣州刺史)·도독교광영강 등 팔주 제군사(都督交廣寧江等八州諸軍事)를 역임하였다. 장창(張昌)·진민(陳敏)·두도(杜弢)를 격파하고 소준(蘇峻)의 반란을 평정한 공이 있다. 진서(晉書) 권66 도간열전(陶侃列傳)에 “도간(陶侃)이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있으면서 일이 없자 매일 아침 벽돌 1백 개를 재실 밖으로 옮겼다가 날이 저물면 다시 재실 안으로 옮겼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웃으며 ‘나는 바야흐로 중원(中原)에 힘을 쏟아야 하는데, 이처럼 지나치게 편안하면 대사를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소.’라고 하였다. 그 스스로 분발하고 근면한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侃在州無事, 輒朝運百甓於齋外, 暮運於齋內. 人問其故, 答曰: ‘吾方致力中原, 過爾優逸, 恐不堪事.’ 其勵志勤力, 皆此類也.]”라고 하였다.
- 운벽[運甓] 벽돌을 나름. 동진(東晉) 때의 무장(武將)인 도간(陶侃)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가난하게 살다가 현리(縣吏)가 되었다. 거듭 승진하여 남만 장사(南蠻長史)에 오르고, 또한 나라에 큰 공을 세워 형주 자사(荊州刺史)에 올라 무창(武昌)에 주둔하였다. 그런데 왕돈(王敦)의 시기를 받아 광주 자사(廣州刺史)로 좌천되었는데, 고을을 다스림에 한가할 때면 매일 아침에 벽돌 100장을 집 안에서 밖으로 운반하고 저녁에는 다시 밖에서 안으로 운반하면서, 신체를 단련하고 뜻을 가다듬곤 하였는데, 누가 그 까닭을 묻자 “내가 바야흐로 중원의 통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데, 너무 한가하게 지내다 보면 그 중한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런다.[吾方致力中原, 過爾優逸, 恐不堪事.]”라고 하였다. 그 후 왕돈이 패한 뒤 형주로 다시 돌아왔다. <晉書 卷66 陶侃列傳>
- 관재[官齋] 관청건물. 관아를 이른다.
- 정근[精勤] 쉬지 않고 부지런히 힘씀. 쉬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일이나 공부에 아주 부지런함. 정성스럽고 부지런하다. 근면성실하다. 정근하다.
- 정근[精勤]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빔. 중들이 병을 구원하기 위해 치성드리던 일. 중들이나 무당을 모아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빌던 일. 나라의 가뭄이나 재앙(災殃)이 들 때 중이나 무당들을 모아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던 일.
- 가기이급[可企而及] 도모하여 할 수 있다.
- 사안[謝安] 사안(謝安)은 진(晉)나라 양하(陽夏) 사람으로 자는 안석(安石),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사안의 집안은 당대의 명문거족이었는데, 처음에 좌저작랑(佐著作郞)을 지내다가 병이 들어 관직을 그만두고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은거하여 조정에서 여러 번 불러도 나가지 않고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서 은거하며 왕희지(王羲之), 지둔(支遁) 등과 교유하여 사동산(謝東山)으로 일컬어진다. 경륜과 지략이 뛰어나 명망이 높았음에도 세상에 나오지 않자, 당시 사람들이 “안석이 세상에 나오지 않으니, 창생들을 어찌하려는가.[安石不肯出, 將如蒼生何?]”라고 하였다. 그 후 40세가 되어 환온(桓溫)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사마(司馬)가 되었다. 이어 시중(侍中)으로 승진했을 때 효무제(孝武帝)가 즉위하였다. 환온(桓溫)이 반역할 뜻을 품었으나 사안(謝安)은 왕탄지(王坦之)와 함께 잘 대처하였고, 환온(桓溫)이 죽자, 상서복사(尙書僕射)와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부견(苻堅)이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회수(淮水)와 비수(肥水)에 주둔하니 경사(京師)가 진공(震恐)하였는데, 사안(謝安)은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이 되어 부견(苻堅)의 군사를 크게 깨뜨렸다. 이 비수지전(肥水之戰)은 고대 중국의 전사에서 소수로 다수를 이긴 매우 중요한 전투로 꼽힌다. 이 공로로 태보(太保)로 승진되고 건창현공(建昌縣公)에 봉해졌으며, 뒤에 자청해서 광릉(廣陵)에 출진(出鎭)하였으며,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출정한 일도 있었다. 말년에는 건강궁(建康宮) 남쪽 교외에 호화스러운 별장을 짓고 그곳에서 지냈다. 비수지전을 치른 뒤 두 해 만에 세상을 떴고, 건강의 매강(梅岡: 지금의 석자강石子岡)에 묻혔다. 죽은 뒤에 태부(太傅) 겸 여릉군공(廬陵郡公)으로 봉해졌고, 사람들은 그를 사태부(謝太傅), 사안석(謝安石), 사상(謝相), 사공(謝公) 등으로 불렀다. 명재상인 동시에 고결(高潔)의 전범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국초의 왕도(王導)와 함께 명재상으로 칭송이 높았고 당대의 손꼽히는 문화인이기도 했다. 통감절요(通鑑節要) 권29 진기(晉紀)에 “사안이 재상으로 있을 때에 진(秦)나라가 자주 노략질을 해 와 대중들이 두려워하였는데, 사안이 진정하였다. 그의 정사는 큰 강령을 힘쓰고 작은 일을 하나하나 따지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사안을 왕도(王導)에 견주었고, ‘문아하기로는 왕도보다 낫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참고로, 이백(李白)의 시 추야독좌회고산(秋夜獨坐懷故山)에 “어려서는 산에서 지내며 안석을 사모하고, 평생 동안 먼 곳을 떠돌며 굴원에게 배웠네.[小隱慕安石, 遠遊學屈平.]”라고 하였다.
- 사안위기[謝安圍棋] 사안(謝安)이 바둑을 둠. 적의 침입을 받고도 태연하게 대처하는 것을 뜻한다. 사안(謝安)은 동진(東晉) 때 양하(陽夏) 사람으로 자는 안석(安石),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당시 북방에서 전진왕(前秦王) 부견(苻堅)이 남침하자 정토대도독에 임명되었는데, 그의 조카 사현(謝玄)의 승전 보고를 받고도 태연히 바둑두기를 끝내고 안으로 들어갈 때 기뻐하여 나막신의 굽이 떨어지는 것도 몰랐다고 한다. 이처럼 교정진물(矯情鎭物)했다고 한다. 진서(晉書) 권79 사안열전(謝安列傳)에 “당시 부견(苻堅)이 강성하여 국경이 위태로워지고 여러 장수들이 연이어 패퇴하자, 사안(謝安)은 동생 사석(謝石)과 조카 사현(謝玄) 등을 보내 기회를 틈타 정벌하게 했고,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공로로 사안은 위장군(衛將軍)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임명되고, 건창현공(建昌縣公)에 봉해졌다. 이후 부견이 백만 대군을 이끌고 회비(淮肥)에 진을 치자, 수도는 공포에 휩싸였고, 사안은 더하여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으로 임명되었다. 사현이 들어와 계책을 물으니 사안은 태연하게 두려운 기색이 없이 답하기를 ‘이미 별도의 생각이 있다’라고만 하며 고요하기만 하였다. 사현이 감히 다시 묻지를 못하고 이에 장현(張玄)에게 명하여 재차 묻도록 하였다. 사안은 수레를 몰아 별장으로 나가자 한 뒤 친한 친구들을 불러 모아 사현과 더불어 내기 바둑을 두었다. 사안은 항상 바둑실력이 사현보다 못하였는데 이날만은 사현은 불안하여 적수(敵手)에 두어 이기지 못하였다. 사안은 생질인 양담(羊曇)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별방을 너에게 주마’라고 하였다. 사안은 노닐다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와서는 장수들에게 지시한 뒤 각자 맡은 바를 당부하였다. 사현 등이 이미 부견을 격파하여 보고서가 다다랐는데도 사안은 손님과 마주하여 바둑을 두었고, 보고서에 이미 이겼다는 것을 보고도 전령을 침상 곁에 세워둔 채 아무런 기뻐하는 기색이 없이 이전처럼 바둑을 두었다. 손님이 묻자 천천히 답하기를 ‘우리 애들이 마침내 적을 격파하였다는군요.’라고 하였다. 바둑을 파한 뒤 안으로 들어와 문지방을 넘는데 마음속으로 너무 기뻐서 신발굽이 꺾어지는지도 깨닫지 못했으니 그 감정을 억제하여 사물을 태연하게 대함이 이와 같았다.[時苻堅強盛, 疆場多虞, 諸將敗退相繼. 安遣弟石及兄子玄等應機征討, 所在剋捷. 拜衛將軍·開府儀同三司, 封建昌縣公. 堅後率眾, 號百萬, 次于淮肥, 京師震恐. 加安征討大都督. 玄入問計, 安夷然無懼色, 答曰: ‘已別有旨.’ 既而寂然. 玄不敢復言, 乃令張玄重請. 安遂命駕出山墅, 親朋畢集, 方與玄圍棋賭別墅. 安常棋劣於於玄, 是日懼, 便為敵手而又不勝. 安顧謂其甥羊曇曰: ‘以墅乞汝.’ 安遂游涉, 至夜乃還, 指授將帥, 各當其任. 玄等既破堅, 有驛書至, 安方對客圍棋, 看書既竟, 便攝放床上, 了無喜色, 棋如故. 客問之, 徐答云: ‘小兒輩遂已破賊.’ 既罷, 還內, 過戶限, 心喜甚, 不覺屐齒之折, 其矯情鎮物如此.]”라고 한 데서 연유하였다.
- 위기[圍棋] 바둑. 서로 상대하여 말이 없이도 의사가 통한다는 뜻으로, 바둑 또는 바둑 두는 일을 이르는 말. 참고로, 세설신어(世說新語) 교예(巧藝)에 “왕 중랑은 바둑을 ‘앉아서 숨는 것’이라고 하였고, 지공은 바둑을 ‘손으로 담화하는 것’이라고 했다.[王中郞, 以圍棋是坐隱. 支公, 以圍棋爲手談.]”라고 하였다. 왕 중랑은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왕탄지(王坦之)이고, 지공은 고승(高僧) 지둔(支遁)을 가리킨다. 바둑의 유래는 은(殷)나라 걸왕(桀王)이 석주(舄胄)에게 명하여 만들었다고도 하고, 요 임금이 아들 단주(丹朱)가 지나치게 아둔하여 지혜를 계발시켜 주기 위하여 만들었다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위기(圍棋)에 대한 중국의 기록으로는, 구당서(舊唐書) 권199 동이열전(東夷列傳) 고려조(高麗條)에 “위기, 투호의 놀이를 좋아한다.”라고 하였고, 주서 권49 열전 백제조에 “투호(投壺), 저포(樗蒲) 등의 잡희(雜戱)가 있으나, 장기와 바둑을 좋아한다.”라고 하였고, 북사 권94 열전 백제조에 “투호, 위기, 저포, 농주(弄珠), 악삭(握槊) 등의 잡희(雜戱)가 있는데, 장기와 바둑을 더욱 좋아한다.”고 하였고, 수서 권81 열전 백제조에 “투호, 위기, 저포, 악삭 등의 놀이가 있다.”고 하였으며, 우리나라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권25 개로왕(蓋鹵王) 21년 조에 “백제 왕 근개루(近蓋婁)가 바둑을 좋아하였는데, 도림(道琳)이 대궐 문에 나아가 고하기를 ‘신은 어려서 바둑을 배워 자못 묘경(妙境)에 들어갔는데, 왕께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 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라고 하였고, 삼국유사 권5에 “효성왕(孝成王)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현사(賢士) 신충(信忠)과 궁정의 잣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었다.”라고 하였다.
- 별서[別墅] 농장이나 들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 전장(田莊)이 있는 부근에 한적(閑寂)하게 지은 집. 별장(別莊)과 비슷하나 농사(農事)를 경영(經營)하는 점이 다름.
- 진정[鎭定/鎮定] 마음이 안정되어 움직임이 없는 것. 마음이 가라앉아 안정됨. 반대하는 세력 따위를 진압하여 평정함. 반대 세력이나 기세를 강압적인 힘으로 억눌러 편안하게 함. 침착하다. 진정시키다. 마음을 가라앉히다. 차분하다. 냉정하다. 진정(鎮定). 침착함.
- 비학이능[非學而能] 배워서 가능한 것이 아님.
【譯文】 身爲重臣而精勤, 面臨大敵猶弈棋.
晉代的名臣陶侃, 在閑暇的時候, 仍然運磚修習勤勞, 這種精勤的態度, 是我們做得到的. 晉代名相謝安, 在面臨大敵時, 仍然能和朋友從容不迫地下棋, 這種鎮定的功夫, 就不是我們學得來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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