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고조[萬人鼓噪] 소식(蘇軾)의 시 팔월십오일간조오절(八月十五日看潮五絶)에 기2(其二)에 “북치고 고함치듯 밀려드는 바닷물, 그 모습 왕아동이 강에 띄운 수군 같네. 파도 높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지만, 달빛에 비친 산들 물보라에 섞여 있네.[萬人鼓噪懾吳儂, 猶似浮江老阿童. 欲識潮頭高幾許, 月山渾在浪花中.]”라고 한 데서 보인다. 좌전(左傳) 애공십칠년(哀公十七年)에서 전하는, 나아가 오(吳)나라 군대를 겁먹게 하여 이긴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만인과[萬人科] 대개 병란을 겪은 이후로 무인을 늘리기 위해 한꺼번에 만 명을 뽑던 무과(武科)를 이른다. 만인과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최명길(崔鳴吉)의 지천집(遲川集)에 실린 이귀(李貴)의 행장인데 “혼조(昏朝)에 이르러 또 만인과를 만들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조신(曺伸)의 소문쇄록(謏聞瑣錄) 속잡록(續雜錄) 정축년 상(丁丑年上)에 “그 후에 관에 명령하여 만인과를 보게 하여 공사천(公私賤)을 막론하고 각기 한 가지 기술만 있으면 과거를 허락하여 그 노고에 보답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국역 인조실록 16년 5월 16일 조에 보면, “수십 년 이래 병란이 끊임없이 일어나 과목(科目)이 많아져 만인과와 오천인과(五千人科)가 있기까지 하여 수많은 출신이 계속해서 나왔고 경외(京外)의 포수(砲手)는 공사 노비가 대신 시사(試射)하고 함부로 부거(赴擧)하여 출신 아닌 자가 없을 정도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만인과는 광해군 때 처음 만들어져 병자호란 이후에 제도로 시행되었는데, 그 대상은 공사천까지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는 만인과 또는 만과(萬科)라고 불리면서 무과의 이칭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만인동락[萬人同樂] 뭇사람이 함께 즐김. 모든 사람이 함께 즐김.
만인산[萬人傘] 고을 백성들이 선정(善政)을 베푼 지방관에게 그 덕을 기리기 위해 기념으로 바치던 물건. 모양은 일산(日傘)과 같은데 비단으로 꾸미고, 가장자리에 수령과 유지들의 성명을 기록하였다.
만인수액[萬人手額] 만인이 이마에 손을 얹고 바라봄. 수액(手額)은 이마에 손을 얹는다는 말로, 기뻐하며 경하하거나 공경하는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이 평소 충후(忠厚)하고 정직(正直)하여 시종 절개를 바꾸지 않으므로 천하에 명망을 얻었는데, 신종(神宗) 때에 조정에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극력 반대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해 벼슬에서 물러나 낙양(洛陽)으로 돌아와 지냈다. 낙양에서 지낸 지 15년 동안에 명망이 더욱 높아져 천하 사람들이 ‘진재상(眞宰相)’이라 하였고, 농부와 야로(野老)들도 모두 ‘사마상공(司馬相公)’이라 불렀으며, 부인과 어린아이들도 그의 자가 군실(君實)임을 알았다고 한다. 신종이 죽자, 사마광이 개봉부(開封府) 대궐로 문상하러 왔는데, 위사(衛士)들이 그를 바라보며 모두 손을 이마에 얹으면서[以手加額] 이르기를 “이분이 바로 사마상공(司馬相公)이시다.”라고 하였고, 그가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길을 막고 모여 구경하며 이르기를 “공은 낙양으로 돌아가지 마시고 그대로 남아 천자를 도와 백성들을 살게 해주소서.”라고 하였다. 당시 즉위한 철종(哲宗)이 어려 대리청정하던 태황태후(太皇太后) 고씨(高氏)가 즉시 사마광을 다시 기용하여 재상으로 삼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宋史 卷336 司馬光列傳>
만인왕[萬人往] 만인을 대적한다는 것은, 증자(曾子)가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큰 용맹을 부자께 들었는데, 스스로 반성해 보아 정직하지 못했으면 아무리 천인이라도 내가 그를 두렵게 하지 않거니와 스스로 반성해 보아 정직했으면 아무리 천만인이 앞에 있더라도 내가 가서 대적할 수 있다.[吾嘗聞大勇於夫子矣, 自反而不縮, 雖褐寬博, 吾不惴焉, 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公孫丑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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