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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감식과 풍속교화의 방법 <圍爐夜話위로야화>


곽임종은 사람의 부류를 감식함에 있어

대부분 세밀한 부분에 마음을 기울였고

왕언방은 향리의 풍속을 교화함에 있어

언제나 덕성과 신의를 중심으로 삼았다.


郭林宗爲人倫之鑑,  多在細微處留心.
곽임종위인륜지감,  다재세미처유심.
王彥方化鄕里之風,  是從德義中立腳.
왕언방화향리지풍,  시종덕의중입각.

<圍爐夜話위로야화>


  • 곽임종[郭林宗]  임종(林宗)은 후한(後漢)의 고사(高士) 곽태(郭泰)의 자(字)이다. 세상에서 유도선생(有道先生)이라고 하였다. 집안이 빈천하였고 어릴 때에 아버지를 잃었다. 굴백언(屈伯彦)에게 사사하여 분전(墳典)에 해박하였다. 낙양에 가서 당시 하남윤(河南尹) 이응(李膺)과 깊이 교제하며 명성을 떨쳤다. 환제(桓帝) 때 당고(黨錮)의 사건이 일어나 천하의 명현(名賢)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구당(鉤黨)으로 지목받고 남김없이 멸절당하는 상황에서 몸을 깨끗이 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말을 겸손히 하여 환관들의 중상을 면함으로써 끝까지 화를 당하지 않았다. 말년에는 후학을 가르치는데 힘을 썼는데 제자가 천 명에 이르렀다. 후한서(後漢書) 권68 곽태열전(郭泰列傳)에 “임종은 비록 인물 품평을 잘하였지만 지나친 언론을 하지 않았기에 환관(宦官)들이 정권을 전횡하면서도 그를 해치지 못하였다.[林宗雖善人倫, 而不爲危言覈論, 故宦官擅政而不能傷也.]”라고 하였고, 혹자가 “곽임종(郭林宗)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묻자, 범방(范滂)이 “그는 세상을 피해 숨어도 개지추(介之推)처럼 어버이의 뜻을 어기지 않고, 절조가 곧아도 유하혜(柳下惠)처럼 속세와 단절하지 않으며, 천자도 신하로 삼을 수 없고, 제후도 벗으로 삼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한다.[隱不違親, 貞不絶俗. 天子不得臣, 諸侯不得友. 吾不知其他.]”라고 대답한 말이 전한다.
  • 곽임종이파증득맹민[郭林宗以破甑得孟敏]  곽임종(郭林宗)은 깨진 시루를 가지고 맹민(孟敏)을 얻음. 곽임종(郭林宗)은 곽태(郭泰)로 후한(後漢)의 고사(高士)인데 임종(林宗)은 그의 자이며 태원(太原) 개휴(介休) 사람이다. 그는 인물을 잘 알아보고 품평을 잘하였다. 맹민(孟敏)은 자가 숙달(叔達)로 거록(鉅鹿)의 양씨(楊氏) 사람인데 젊었을 적에 태원(太原) 땅에서 객지살이를 하였다. 어느 날 맹민(孟敏)이 장에 팔기 위해 시루를 지고 가다가 떨어뜨려 깨졌으나, 맹민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당시 태원(太原) 지방의 명사였던 곽태(郭泰)가 이를 보고 맹민에게 깨진 시루를 돌아보지 않고 가는 이유를 묻자, 맹민이 “시루가 이미 깨졌는데 돌아본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甑以破矣, 視之何益.]”라고 대답하였다. 곽태는 맹민의 인물이 비범함을 알아보고 학문에 힘쓰도록 권유하였는데, 10년이 지나 맹민은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고 삼공(三公)의 지위에 올랐다. <後漢書 郭泰傳>
  • 숙도천경피[叔度千頃陂]  중국 후한(後漢) 때 황헌(黃憲)의 자는 숙도(叔度)인데, 황헌(黃憲)은 어렸을 때부터 덕망과 학식으로 사람들의 존숭을 받으며 안자(顔子)에 비유되기까지 하였는데, 후한(後漢)의 고사(高士)인 곽태(郭泰)가 그에 대해서 “숙도의 그릇은 천경의 일렁이는 저수지 물처럼 넓고 깊어서 사람들이 맑게 할 수도 없고 흐려지게 할 수도 없으니 어떻게 측량할 수가 없다.[叔度汪汪若千頃陂, 澄之不淸, 淆之不濁, 不可量也.]”고 평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68 郭泰列傳> <後漢書 卷53 黃憲列傳>
  • 이곽선주[李郭仙舟]  이곽선주(李郭仙舟)는 이응(李膺)과 곽태(郭泰)가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신선 같다고 찬탄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이응(李膺)은 후한(後漢) 사람으로 자는 원례(元禮)이다. 사람들이 그의 영접을 받기만 해도 “용문에 올랐다.[登龍門]”라고 자랑할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곽태(郭太)는 자가 임종(林宗)으로 집안이 매우 빈천(貧賤)하였다. 낙양(洛陽)에 들어가 부융(符融)의 소개로 하남윤(河南尹) 이응(李膺)을 한번 만났는데 이응이 크게 인정을 하고 사우(師友)의 예로 대접하자, 곽태의 명성이 경사(京師)를 진동하였다. 그 뒤 곽태가 고향에 돌아가려 하자, 강가에 나와 전송한 제유(諸儒)의 수레가 수천 대나 되었는데, 이응이 곽태를 전송하면서 둘이서만 배를 타고 강을 건너자 모든 빈객들이 신선과 같다고 찬탄하면서 부러워했다는 이곽선주(李郭仙舟)의 고사가 전한다. 전하여 이응과 곽태가 함께 배를 탄다는 것은 곧 귀천에 관계없이 서로 친밀한 지기지우(知己之友)가 됨을 비유한다. <後漢書 卷68 郭太列傳>
  • 임종건[林宗巾]  임종(林宗)은 후한(後漢)의 명사(名士) 곽태(郭泰)는 자이다. 학문이 대단하였고 제자가 수천 명에 달하였다. 곽태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비를 만나 그가 쓴 두건의 일각(一角)이 빗물에 젖어 꺾였는데, 그를 본 당시 사람들이 일부러 그렇게들 한 쪽 귀를 접어서 쓰면서 그 두건을 일러 임종건(林宗巾)이라고 하였다 한다. <後漢書 卷98 郭泰列傳>
  • 임종언손[林宗言遜]  곽임종(郭林宗)은 말이 겸손함. 후한서(後漢書) 권68 곽태열전(郭泰列傳)에 “임종은 인물의 평가를 잘면서도 국정에 대해서는 자기 소신대로 할 말을 다하거나 심각하게 비평하지 않았으므로, 환관들이 정권을 휘두를 적에도 그를 해치지 못하였다.[林宗雖善人倫, 而不爲危言覈論, 故宦官擅政而不能傷也.]”라고 하였고.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나라에 도가 있을 적에는 굽히지 말고서 소신껏 말도 하고 행동도 해야 하지만,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행동은 소신껏 하되 말은 겸손하게 해야 한다.[邦有道, 危言危行. 邦無道, 危行言孫.]”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 임종지통[林宗之慟]  곽임종(郭林宗)의 통곡. 곽임종은 후한(後漢) 때의 명현(名賢)인 곽태(郭太)로, 임종은 그의 자이다. 그는 학문과 덕망이 뛰어나 당대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영제(靈帝) 건녕(建寧) 원년(168)에 태부(太傅)인 진번(陳蕃)과 대장군 두무(竇武)가 환관의 전횡을 막기 위해 모살(謀殺)하려다가 실패하였다. 그 일로 오히려 진번과 이응 등 100여 명이 피살되고 이어 700여 명이 유배당하거나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때 곽태가 이 소식을 듣고는 들에서 시경(詩經) 첨앙(瞻卬)의 “이 사람들이 죽었으니 나라가 피폐해지겠구나.[人之云亡, 邦國殄瘁.]”라는 시구를 외우며, “이제 한나라도 망하게 되었구나.[漢室亡矣.]”라고 통곡하였다 한다. <後漢書 卷68 郭太列傳>
  • 인륜[人倫]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순서라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랫사람, 벗과 벗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를 이르는 말.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 초자연적으로 정해진 인류의 질서 관계. 오륜(五倫)의 도(道). 참고로,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사람에게는 도리가 있는데, 배불리 먹고 따뜻이 옷을 입어 편안히 거처하기만 하며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금수에 가까워진다. 성인인 순(舜)임금이 이를 근심하시어 설(契)을 사도로 삼아 인륜을 가르치게 하셨으니, 부자간에는 친함이 있으며, 군신간에는 의리가 있으며, 부부간에는 분별이 있으며, 장유간에는 차례가 있으며, 붕우 간에는 진실함이 있는 것이다.[人之有道也, 飽食煖衣, 逸居而無敎, 則近於禽獸. 聖人有憂之, 使契爲司徒, 教以人倫,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敘, 朋友有信.]”라고 하였다.
  • 인륜[人倫]  인물 감식안. 인물 품평. 사람을 평가하다. 사람을 비교하다. 윤리도덕의 인륜(人倫)을 말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인품(人品)을 논평함을 이른다. 윤(倫)은 등륜(等倫). 즉 나이나 신분(身分)이 서로 같거나 비슷한 사람을 뜻한다. 예기(禮記) 곡례 하(曲禮下)에 “어떤 사람을 비견할 때는 반드시 비슷한 사람으로 비견해야 한다.[擬人必於其倫.]”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注)에 “윤(倫)은 유(類: 무리)와 같다.[倫猶類也.]”라고 하였다. 참고로, 후한서(後漢書) 권68 곽태열전(郭泰列傳)에 “임종(林宗)은 비록 인륜(人倫)에 능했으나, 위태로운 말을 하거나 날카롭게 비판[危言覈論위언핵론]하지 않았으므로, 환관(宦官)들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러도 해를 입지 않았다. 당고(黨錮)의 화(禍)가 일어났을 때, 이름난 선비들이 대부분 그 화를 입었으나, 오직 임종과 여남(汝南) 사람 원굉(袁閎)만이 화를 면하였다. 이에 문을 닫고 제자를 가르쳤는데, 제자가 천 여 명에 이르렀다.[林宗雖善人倫, 而不爲危言覈論, 故宦官擅政而不能傷也. 及黨事起, 知名之士多被其害, 唯林宗及汝南袁閎得免焉. 遂閉門敎授, 弟子以千數.]”하고 한 데서 보인다. 곽임종(郭林宗)은 후한(後漢) 사람으로 이름은 태(泰)이고 자가 임종(林宗)이다. 그는 특히 인물 감식이 뛰어났는데 인재 뽑는 기준으로 삼을 법을 적은 책 한 권을 지었으나 유실되었다.
  • 다재[多在]  대부분. 참고로,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의 귀전록(歸田錄)에 “나는 평생에 지은 문장이 대부분 삼상에서 얻은 것이니, 바로 말 위와 베개 위와 뒷간 위인데, 대체로 이곳만이 생각을 짜내기에 가장 알맞기 때문이다.[余平生所作文章, 多在三上, 乃馬上枕上廁上也. 蓋惟此尤可以屬思爾.]”라고 한 데서 보인다.
  • 세미[細微]  썩 가늘고 자지레함. 미세하다. 자잘하다. 작은 일. 소사(小事). 미천하다. 참고로,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도는 잠시도 떠날 수가 없으니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어두운 곳보다 드러남이 없으며 미세한 일보다 나타남이 없으니,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를 삼가는 것이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라고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注)에 “은(隱)은 어두운 곳이고 미(微)는 세미한 일이다. 독(獨)은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자기만 아는 부분이다. 이 구절은 어두울 때와 세미한 일은 자취는 비록 나타나지 않았으나 기미는 이미 동하였고, 남은 비록 알지 못하나 자기만은 알고 있으니, 이는 천하의 일이 드러나 보이고 밝게 나타남이 이보다 더함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隱, 暗處也. 微, 細事也. 獨者, 人所不知而己所獨知之地也. 言幽暗之中, 細微之事, 跡雖未形, 而幾則已動, 人雖不知, 而己獨知之, 則是天下之事, 無有著見明顯而過於此者.]”라고 하였다.
  • 유심[留心]  마음에 담아 둠. 마음에 새겨 두어 조심(操心)하며 관심(關心)을 가짐. 주의하다. 조심하다. 신경을 쓰다. 유념하다.
  • 왕언방[王彦方]  언방(彦方)은 후한(後漢) 때 학자인 왕렬(王烈)의 자이다. 영천(穎川)의 진식(陳寔)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두 아들과 친구가 되었는데, 당시 영천의 명사 순상(荀爽), 가위절(賈偉節), 이응(李膺), 한원장(韓元長) 등이 모두 진식에게서 배웠고, 왕렬의 성격과 행위에 탄복하여 모두 그와 교유하였다. 효렴으로 천거를 받았으나 동탁의 난을 만나 요동으로 피해 가서 요동태수 공손탁(公孫度) 밑에서 일을 했다. 조조가 그의 인품과 행정력을 높이 사 여러 차례 등용하려 하였으나 공손탁과 그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그를 놔주지 않았다. 건안(建安) 23년에 78세로 병사하였다. 의로운 처신으로 부근에 이름나서 고을에서 송사(訟事)가 벌어지면 왕렬에게 찾아가 시비를 가려 달라고 청하였는데, 소송 당사자들이 왕렬을 찾아가다가 중도에 화해하여 돌아가기도 하고 멀리 왕렬의 집이 보이면 부끄럽게 여겨 그냥 돌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 왕렬유포[王烈遺布]  왕열(王烈)이 포(布)를 줌. 왕렬은 후한(後漢)의 태원(太原) 사람으로 자(字)는 언방(彦方)이며 의행(義行)을 하는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후한서(後漢書) 권81 독행열전(獨行列傳) 왕열(王烈)에 “왕렬(字)은 자가 언방(彦方)으로 태원(太原) 사람이다. 어릴 때 진식(陳寔)에게 사사한 후 그 의행(義行)으로 이름이 났다. 고을에 소를 훔친 자가 있었는데, 주인이 그 도둑을 잡았다. 도둑이 죄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형륙(刑戮)도 달갑게 받겠습니다만, 빌건대 왕언방(王彦方)이 알게 하지는 말아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렬이 그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사례(謝禮)하고, 도둑에게 포(布) 1단(端)을 주었다. 어떤 사람이 이유를 묻자, 왕렬이 대답하기를 ‘도둑이 자기의 잘못을 내가 알까봐 두려워했다면, 이는 악행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미 악행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잘못을 고쳐 올바르고 착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보내 격려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뒷날 어떤 노인이 길에서 칼을 잃었는데, 길 가던 사람 하나가 그것을 지키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서 그 노인이 돌아와 그 칼을 찾아가면서, 이상히 여겨 그의 성명을 묻고 이 사실을 왕렬에게 알렸다. 왕렬이 사람을 시켜 그를 찾아보게 하였더니, 이전에 소를 훔쳤던 그 도둑이었다. 그 외에도 고을에서 송사(訟事)가 벌어지면 모두 왕렬에게 찾아가 곡직을 쟁송하여 왕렬에게 질정을 받으려 하다가 혹 길에 올랐다가 화해하여 돌아가기도 하고, 혹 왕렬의 집을 바라보고는 돌아가기도 하였다. 그가 덕(德)으로 사람을 감동시킨 것이 이러하였다.[王烈字彥方, 太原人也. 少師事陳寔, 以義行稱. 鄉里有盜牛者, 主得之, 盜請罪曰: ‘刑戮是甘, 乞不使王彥方知也.’ 烈聞而使人謝之, 遺布一端. 或問其故, 烈曰: ‘盜懼吾聞其過, 是有恥惡之心. 既懷恥惡, 必能改善, 故以此激之.’ 後有老父遺劍於路, 行道一人見而守之, 至暮, 老父還, 尋得劍, 怪而問其姓名, 以事告烈. 烈使推求, 乃先盜牛者也. 諸有爭訟曲直, 將質之於烈, 或至塗而反, 或望廬而還. 其以德感人若此.]”라고 하였다. 삼국지(三國志) 권11 위서(魏書) 왕렬전(王烈傳)에는 “왕렬(王烈) 당시에 소를 훔친 자가 붙잡혔는데, 소 주인이 용서해 주니 소도둑은 잘못을 뉘우치고 왕렬이 절대로 이 사실을 모르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왕렬이 이 일을 듣고는 소를 훔친 자에게 베 1단(端)를 보내 주었다. 이에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왕렬이 대답하기를 ‘전에 진 목공(秦穆公)은 자신의 준마(駿馬)를 훔쳐다가 잡아먹은 자에게 술을 내려 주었는데, 그자가 나중에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목공을 어려운 상황에서 구해 주었다. 지금 이 도둑도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내가 알까 두려워하니, 이는 잘못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안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면 선한 마음이 생길 것이므로 베를 주어 선한 행실을 권면한 것이다.[昔秦穆公, 人盜其駿馬食之, 乃賜之酒. 盜者不愛其死, 以救穆公之難. 今此盜人能悔其過, 懼吾聞之, 是知恥惡. 知恥惡, 則善心將生, 故與布勸爲善也.]’라고 하였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노인을 도와 수십 리나 짐을 져다 주기도 하고, 길에서 잃어버린 검(劍)을 그 자리에서 지키고 있다가 주인을 찾아 주기도 하였는데, 그 사람이 바로 전에 소를 훔친 사람이었다.”라고 하였다.
  • 향리[鄕里/鄕裏]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시골의 마을. 고향(故鄕). 사는 곳이나 고향이 같은 사람. 참고로, 묵자(墨子) 상현중(尙賢中)에 “집에 있을 때는 어버이를 잘 모실 줄 모르고, 나가서는 고향이 중한 것을 알지 못한다.[入則不慈孝父母, 出則不長弟鄕里.]”라고 하였고, 진서(晉書) 권94 도잠열전(陶潛列傳)에 “진(晉)나라 도잠(陶潛)이 팽택현령(彭澤縣令)으로 있을 적에, 군(郡)에서 파견한 독우(督郵)의 시찰을 받게 되었는데, 아전이 도잠에게 의관을 갖추고 독우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고 하자, 도잠이 탄식하면서 ‘내가 쌀 다섯 말 때문에 허리를 꺾어 향리의 어린아이에게 굽실거릴 수는 없다.[我不能爲五斗米, 折腰向鄕里小兒.]’고 하고는, 즉시 수령의 인끈을 풀어 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고사에서 보인다.
  • 향리[鄕里]  지방 행정 구역 이름이다. 향(鄕)은 신라 때부터 조선 전기까지 있었던 특별 행정 구역으로, 천민이 집단으로 거주하며 국가에 공납을 바치던 부락이다. 이(里)는 고려 시대에 방(坊) 아래에 두었던 말단 행정 구역 단위이다. 지방행정조직으로 1향(鄕)은 1만 2,500호이고 1리(里)는 25호이다.
  • 시종[是從]  ~을 따르다. ~에 따르다. ~을 좇다. ~을 기준으로 한다, ~의 입장에서 본다.
  • 덕의[德義]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도덕상(道德上)의 의리(義理). 덕성(德性)과 신의(信義). 상(賞)은 줄 만한 사람에게 주고, 벌(罰)은 죄에 맞게 주는 것. 선(善)을 선으로 여기는 것이 덕(德)이요, 악(惡)을 미워하는 것이 의(義)이다. 참고로, 국어(國語) 진어4(晉語4)에 춘추 시대 진 문공(晉文公)이 원수(元帥)의 적임자를 조최(趙衰)에게 물었을 때, 극곡(郤穀)의 학문이 독실하다고 추천하면서 “선왕의 법도를 좋아하는 자는 덕의의 곳간을 가진 것과 같은데, 덕의란 바로 생민의 근본이 된다.[夫好先王之法者 德義之俯也 夫德義 生民之本也]”라고 일컬은 고사가 전하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28년 조에 “대저 아름다운 우물이 있으면 사람의 마음을 동요시키기에 충분하니, 진실로 덕의가 아니면 반드시 재앙을 입게 된다.[夫有尤物, 足以移人, 苟非德義, 則必有禍.]”라고 한 데서 보인다.
  • 입각[立腳/立脚]  다리를 세운다는 말로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몸을 의연히 지키는 것. 어떤 사실이나 주장 따위를 근거로 삼아 확고하게 지키는 것. 똑바로 발을 디디다. 똑바로 서다. 발을 붙이다. 살아가다. 일정한 처지에 서다. 새롭게 출발점에 서다. 발판으로 하다. 관찰이나 판단의 기초. 세운 뜻. 입신(立身).

【譯文】 察倫常留心細微,  化鄉風道義爲本.
郭太鑒察倫常的道理,  往往在人們不易注意之處留意  ;  而王烈教化鄉裏風氣,  總是道德和正義爲根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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