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귀와 영화를 자랑하더라도
공덕과 문장을 후세에 전할 수 있어야 하고
가르침으로 명성이 자자하더라도
인품과 마음씨는 사관을 속여 넘길 수 없다.
漫誇富貴顯榮, 功德文章, 要可傳諸後世.
만과부귀현영, 공덕문장, 요가전제후세.
任教聲名煊赫, 人品心術, 不能瞞過史官.
임교성명훤혁, 인품심술, 불능만과사관.
<圍爐夜話위로야화>
- 만과[漫夸/漫誇] 자만이 넘치다. 함부로 자랑하다. 허풍을 떨다. 자랑하다. 과시하다. 칭찬이 넘치다.
- 부귀[富貴] 재산(財產)이 많고 지위(地位)가 높음.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 박박주(薄薄酒)에 “생전엔 부귀 누리고 사후엔 문장 남긴다 하나, 백 년이 순식간이요 만세가 하 바삐 지나가네. 백이·숙제와 도척의 이름이 모두 덧없는 것이거니, 가장 좋은 건 지금 당장에 한번 취하여, 시비와 우락을 모두 다 잊는 거로세.[生前富貴死後文章, 百年瞬息萬世忙. 夷, 齊, 盜跖俱亡羊, 不如眼前一醉, 是非憂樂都兩忘.]”라고 하였고,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부귀와 복택은 나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고, 빈천과 우척은 너를 옥처럼 다듬어 완성시키는 것이다.[富貴福澤, 將以厚吾之生也. 貧賤憂戚, 庸玉汝於成也.]”라고 하였고,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부귀가 그 마음을 음란하게 하지 못하며 빈천이 그 절개를 옮겨 놓지 못하며 위무가 그 지조를 굽히게 할 수 없는 것을 대장부라 이른다.[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라고 하였고, 한유(韓愈)의 단등경가(短燈檠歌)에 “하루아침에 부귀를 얻으면 도리어 방자해져서, 긴 등잔대 높이 걸어 미인의 머리를 비추게 하네. 아 세상일이 그렇지 않은 것이 없나니, 담장 모퉁이에 버려진 짧은 등잔대를 그대여 보지 않았는가.[一朝富貴還自恣, 長檠高張照珠翠. 吁嗟世事無不然, 牆角君看短檠棄.]”라고 하였다.
- 현영[顯榮] 현달영요(顯達榮耀). 높은 지위(地位)에 올라 영화(榮華)로움. 높은 지위에 올라 귀하게 되다. 입신출세하여 부귀하게 되다. 참고로, 초사(楚辭) 구변(九辯)에 “입 다물고 말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일찍이 받은 은총 생각하면 그럴 수 없고. 강태공은 나이 구십에 귀하신 몸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군신으로 좋은 때 얻지 못했네.[願銜枚而無言兮, 嘗被君之渥洽, 太公九十乃顯榮兮, 誠未遇其匹合.]”라고 하였다.
- 공덕[功德] 공적과 덕행. 공로와 은덕. 공로와 어진 덕(德). 착한 일을 하여 쌓은 업적(業績)과 어진 덕. 여러 사람을 위하여 착한 일을 많이 한 힘. 좋은 일을 행한 덕으로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능력. 착한 일을 많이 한 공과 불도를 닦은 덕. 바람직한 일을 행한 덕으로 갖게 되는 좋은 일을 일어나게 할 수 있는 능력. 종교적(宗敎的)으로 순수(純粹)한 것을 진실공덕(眞實功德)이라 이르고, 세속적(世俗的)인 것을 부실공덕(不實功德)이라 한다. 참고로, 대승의장(大乘義章) 십공덕의삼문분별(十功德義三門分別)에 “공(功)은 생사를 초월하고 열반을 갖추고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고, 이 공은 좋은 일을 행한 사람이 갖추게 되는 덕(德)이라 공덕(功德)이라고 한다.[功謂功能, 能破生死, 能得涅槃, 能度衆生, 名之爲功. 此功是其善行家德, 故云功德.]”고 하였다.
- 문장[文章] 생각·느낌·사상(思想) 등을 글로 표현한 것. 구절을 모아서 한 문제를 논술한 글의 한 편. 곧 산문(散文) 형태의 글을 이른다. 글을 뛰어나게 잘 짓는 사람. 문장가(文章家). 일반적으로 어, 구, 절과 함께 문법을 나타내는 언어 단위의 하나.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 우제(偶題)에 “문장은 천고토록 썩지 않을 사업, 잘 됐는지의 여부는 마음속으로 잘 안다오.[文章千古事, 得失寸心知.]”라고 하였고, 두보(杜甫)의 시 천말회이백(天末懷李白)에 “문장은 운명의 통달함을 미워하고, 악귀는 사람이 오는 걸 기뻐하도다.[文章憎命達, 魑魅喜人過.]”라고 하였다.
- 문장[文章] 학문의 정채(精彩). 내면에 학덕이 충실하게 쌓여 자연히 정채가 겉으로 드러남을 뜻한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학문의 단계적 성취를 말하면서 “흐르는 물은 구덩이를 다 채우기 전에는 더 흘러가지 못하고, 군자가 도(道)에 뜻을 두었을 때는 문장(文章)을 이루지 않고서는 도달하지 못한다.[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君子之志於道也, 不成章不達.]”라고 하였고, 당(唐)나라 한유(韓愈)가 아들에게 준 권학시(勸學詩)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에 “문장이 어찌 귀하지 않으랴마는, 경서의 가르침이 바로 전답과 같다오.[文章豈不貴? 經訓乃菑畬.]”라고 하였다.
- 문장[文章] 한 나라의 문명을 형성한 예악(禮樂)과 제도. 또는 그것을 적어 놓은 글. 단순히 문학 작품을 가리키기 보다는 예악을 비롯한 문물 전장 제도라든가 존비귀천을 구별하는데 쓰이는 거복정기(車服旌旗) 등 통치행위에 필요한 것들을 포괄하여 가리킨다.
- 후세[後世] 뒤의 세상. 뒤에 오는 시대의 사람들. 다음에 오는 세상(世上). 다음 세대(世代)의 사람들. 삼세(三世)의 하나.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 산다는 미래(未來)의 세상(世上). 참고로, 사기(史記) 권53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에 “소하(蕭何)가 전택(田宅)을 궁벽한 곳에 마련하고 집을 지을 적에 담장도 두르지 않으면서 “후세에 어진 자손이 나오면 나의 검소함을 배울 것이요, 불초한 자라도 권세가에게 빼앗기는 일이 없을 것이다.[後世賢, 師吾儉, 不賢, 毋爲勢家所奪.]”라고 말한 고사에서 보인다.
- 임교[任教] 교육을 담당하다. 교편을 잡다. 교직을 맡다. 교화의 직무를 맡다. 참고로, 관자(管子) 군신상(君臣上)에 “이색부(吏嗇夫)는 관리를 감독하는 직무를 맡고, 인색부(人嗇夫)는 백석을 교화하는 직무를 맡는다. 백성을 교화하고, 죄를 논함에 사사로이 흔들리지 않고, 상을 줌에 믿음과 진실을 얻고, 군주와 신하의 도를 체현하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면 민색부의 일이 완결된다.[吏嗇夫任事, 人嗇夫任敎. 敎在百姓, 論在不撓, 賞在信誠, 體之以君臣, 其誠也以守戰, 如此則人嗇夫之事究矣.]”라고 한 데서 보인다.
- 성명[聲名] 명성(名聲). 좋은 평판. 세상(世上)에 널리 퍼져 평판(評判) 높은 이름.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 봉증왕중윤유(奉贈王中允維)에 “중윤인 왕유 명성 들은 지는 오래지만, 멀리 있어 여태껏 만나보지 못했노라.[中允聲名久, 如今契闊深.]”라고 한 데서 보인다.
- 성명[聲名] 성명(聲明)은 성교(聲敎)와 문명(文明)의 병칭으로 교화가 널리 퍼져 문명한 시대를 뜻한다.
- 훤혁[煊赫/喧赫] 업적(業績)이나 공로(功勞) 따위가 빛나고 밝음. 성위(聲威)가 성한 모양. 성세(聲勢) 혹은 권세가 성대함을 형용하는 말. 드날리는 위엄이 밝게 빛나는 모양. 명성이 대단하다.
- 인품[人品] 사람의 품격(品格). 사람의 품격이나 됨됨이. 참고로, 황정견(黃庭堅)의 염계시(濂溪詩)의 병서(幷序)에서 주돈이(周敦頤)의 인품을 가리켜 “용릉의 주무숙은 인품이 매우 고상하여 가슴속이 깨끗하기가 마치 비 갠 뒤의 온화한 바람과 깨끗한 달빛 같다.[舂陵周茂叔人品甚高, 胸中灑落, 如光風霽月.]”라고 한 데서 보인다.
- 심술[心術] 마음씨. 마음 씀. 마음을 수양하는 공부. 마음을 다스리는 기술. 온당(穩當)하지 않고 고집(固執)스러운 마음. 온당하지 않게 고집을 부리는 마음. 남을 골리기 좋아하거나 남이 잘못되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보. 짓궂게 남을 괴롭히거나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는 못된 마음.
- 심술[心術] 소순(蘇洵)의 글 제목이다. 이 글은 장군(將軍)으로서의 도리(道理)를 논술(論述)한 것인데, 소순(蘇洵)은 전쟁(戰爭)을 지휘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 즉 심술(心術)이라고 보았다. 그는 또 심술(心術)의 근본을 의(義)라고 여겨, 오직 정의(正義)의 군대만이 백전불태(百戰不殆)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권서서(權書序)에서 말한 용인제의(用仁濟義)의 관점과도 일치한다.
- 만과[瞞過] 속이어 넘김. 속여 넘기다. 꾀나 거짓말 따위에 속아서 넘어가게 하다.
- 사관[史官] 고대에 중국(中國)에서 사실(史實)의 기록(記錄) 및 문서 관리를 맡아보던 벼슬아치. 상대(商代)에 설치하였는데 원래에는 밖에 주둔한 무관(武官)이었다. 그 후로 임금의 좌우에 있는 사관(史官)이 되었는데 제사(祭祀)와 기사(記事)를 관장하였다. 혹은 작책(作冊)이라고도 하는데 주례(周禮)의 내사직(內史職)에 속하였으며, 서주시대(西周時代)에는 태사(太史), 내사(內史) 등이 있었고, 춘추시대에는 다시 외사(外史), 좌사(左史), 남사(南史) 등이 있었다. 예기(禮記) 옥조(玉藻)에 “식사를 끝마치고는 현단복(玄端服) 차림으로 거처하니, 천자가 동작을 하면 왼쪽의 사관[左史]이 이것을 기록하고 천자가 말을 하면 오른쪽의 사관[右史]이 이것을 기록하였다.[卒食, 玄端而居. 動則左史書之, 言則右史書之.]”라고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사서(史書) 편찬(編纂)의 초고(草稿) 작성을 맡아보던 벼슬 또는 그런 벼슬아치로, 예문관(藝文館)의 봉교(奉敎)・대교(待敎)·검열(檢閱)과 승정원(承政院)의 주서(注書)를 이른다. 참고로, 통감절요(通鑑節要) 권38에 “사관(史官)은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할 뿐, 헛되이 칭찬하지도 않고 악을 숨기지도 않는다.[史官不虛美, 不隱惡.]”라고 하였다.
【譯文】 功德文章傳後世, 史官記載忠與姦.
只知誇耀財富和地位, 也該有值得留於後代的功業或文章才是. 儘管聲名顯赫, 個人的品行和居心是無法欺騙記載歷史的史官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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