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촌[晩村] 여유량(呂留良)을 말한다. 절강(浙江) 석문(石門) 출신으로, 만촌(晩村)은 호이고 자는 장생(莊生)이다. 명(明)나라가 멸망한 후 명나라의 재건을 도모하였다. 청나라 순치(順治) 10년(1653) 과거를 치고 제생(諸生)이 되었으나 오랑캐인 청(淸)나라를 싫어하여 은거하고 나오지 않았으며, 강희(康熙) 연간에는 응시하라는 명을 거부하고 승려가 되었다. 철저한 주자학자(朱子學者)로, 주자학(朱子學)을 위주로 하였으며 화이(華夷)의 분별을 엄격히 했다. 주자의 명분론과 정치론을 따라 중화인(中華人)으로서의 긍지를 지키자는 논설을 많이 지었고 여만촌문집(呂晩村文集)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가 사망한 이후 증정(曾靜)이 그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반청운동을 벌이고 반란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었다. 옹정제 때 일어난 이 문자옥(文字獄)으로 인해 여유량은 1732년(옹정10)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고 일족들이 사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문집도 금서가 되었다.
만추가경[晩秋佳景] 늦가을의 아름다운 경치(景致)를 이른다. 뒤늦게 큰 결실을 맺음을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만추등갑[蠻酋籐甲] 만추(蠻酋)의 등갑(籐甲).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할 때 오과국(烏戈國)의 군대가 입었던 등나무를 기름에 절여 짜서 만든 갑옷으로, 창칼이 들어가지 않고 물에도 가라앉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제갈량의 화공(火攻)에 의해 전멸되었다. <三國志演義>
만축아첨[萬軸牙籤] 아첨(牙籤)은 상아로 만든 책 찌를 말하는데, 한유(韓愈)의 시 송제갈각왕수주독서(送諸葛覺往隨州讀書)에 “업후의 집에는 서책이 하 많아서, 서가에 삼만 두루마리가 꽂혀 있고, 하나하나 상아 찌를 달아 놓았는데, 손도 안 댄 것처럼 깨끗하다네.[鄴侯家多書, 架揷三萬軸. 一一懸牙籤, 新若手未觸.]”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많은 장서(藏書)를 뜻한다. <韓昌黎集 卷7>
만춘[萬春] 만 년. 임금의 수(壽).
만춘절[萬春節] 음력 3월 3일. 금나라 황제의 생일이었다.
만취[晩翠] 겨울에도 변하지 않는 초목의 푸른 빛. 참고로, 송(宋)나라 초기 재상이었던 범질(范質)이 종자(從子) 고(杲)를 경계한 시에 “곱고 고운 동산의 꽃은 일찍 피었다가 다시 먼저 시들고, 더디고 더딘 시냇가의 소나무는 늦도록 푸르름을 머금고 있다.[灼灼園中花, 早發還先萎. 遲遲澗畔松, 鬱鬱含晩翠.]”라고 한 데서 보인다. 범질(范質)은 노국공(魯國公)에 봉해졌으므로 범 노공(范魯公)이라고 부른다.
만취[晩吹] 저녁때 부는 바람을 이른다.
만취선종[晩就善終] 위(魏)나라 왕창(王昶)은 사람됨이 근후(謹厚)하였는데, 조카와 아들의 이름을 묵(默), 침(沈), 혼(渾), 심(深)이라고 지어주고, 이름을 지은 뜻을 되새겨 어기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사물은 속히 이루어지면 빨리 없어지고 늦게 이루어지면 끝이 좋은 법이다.[夫物速成則疾亡, 晩就則善終.]”라고 훈계하였다. <宋元學案 卷40 橫浦學案> <魏志 卷27 王昶傳>
만치[萬雉] 치첩(雉堞)이 만이나 되는 큰 성. 활을 쏘기 위해 뚫어놓은 구멍이 만 개나 되는 큰 성을 가리킨다. 치(雉)는 성원(城垣: 성의 담)의 척도(尺度)의 단위로서, 높이가 열 자, 길이가 서른 자를 이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