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공지배[罔功之輩] 공(功)이 없는 무리라는 뜻이다.
망괴봉전[亡愧俸錢] 당(唐)나라의 위응물(韋應物의 시 기이담원석(寄李儋元錫)에 “몸에 질병이 많으니 시골집 생각이 나고, 들에 유리하는 백성들 있으니 봉록 받기 부끄럽네.[身多疾病思田里, 野有流亡愧俸錢.]”라고 하였다.
망교위지봉[妄校尉之封] 망교위(妄校尉)가 봉후(封侯)가 됨. 보잘것없는 군공(軍功)으로 큰 상을 타는 평범한 무관이 많다는 말이다. 한서(漢書) 권54 이광전(李廣傳)에 “흉노를 치기 시작한 때로부터 내가 항상 종군하였다. 그런데 망교위(妄校尉) 이하에서는 재능이 중간도 못되는데도 군공(軍功)으로 후(侯)에 봉해진 자가 수십 인이나 되었다. 내가 다른 사람에 뒤질 것이 없는데도 아무런 공도 인정받지 못한 채 봉읍(封邑) 하나 얻지 못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自漢擊匈奴而廣未嘗不在其中, 而諸妄校尉以下, 才能不及中人, 然以擊胡軍功取侯者數十人, 而廣不為後人, 然無尺寸之功以得封邑者, 何也?]”라고 하였다.
망구[望九] 81세를 이른다. 80을 넘어 81세가 되면 90을 바라본다고 하여 바라볼 망(望)자를 써서 망구(望九)라 하고, 마찬가지로 71세가 되면 망팔(望八 ;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이라 하고, 91세가 되면 망백(望百)이라 한다.
망구[芒屨] 갈대줄기를 엮어 만든 신을 말한다. 망혜(芒鞋) 또는 망리(芒履)라고도 한다.
망구[輞口] 망구(輞口)는 당(唐)나라 왕유(王維)가 낙양(洛陽)의 종남산(終南山)에 소유했던 망천장(輞川莊)을 가리킨다. 왕유가 은거했던 남전(藍田) 망천(輞川: 지금의 陝西省섬서성 藍田縣남전현 남쪽)의 별장이다. 왕유(王維)가 만년(晩年)에 송지문(宋之問)의 남전 별장을 얻었는데, 망구(輞口)에 있었다. 물이 빙 둘러싼 집 아래에는 대나무를 심은 모래섬과 꽃핀 언덕이 있어, 그곳에서 도우(道友)인 배적(裴迪)과 배를 띄워 오가면서 종일토록 거문고를 뜯고 시를 짓곤 했다. 일찍이 그 전원(田園)에서 지은 시를 모아 망천집(輞川集)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그림도 같이 실었다.
망구범안지절[忘軀犯顔之節] 자신의 몸을 잊고 군주의 면전(面前)에서 곧은 말로 간하는 지조. 한서(漢書) 48권 가의전(賈誼傳)에는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된 자는 임금만 생각할 뿐 자신을 잊고, 나라만 생각할 뿐 집안을 잊고, 공적인 일만 생각할 뿐 사적인 일을 잊는다.[爲人臣者, 主耳忘身, 國耳忘家, 公耳忘私.]”라고 하였고, 한비자(韓非子) 33권 외저설좌 하(外儲說左下)에는 “면전에서 지극히 간하는 것은 신하로서 동곽아(東郭牙)만한 이가 없다.[犯顔極諫 臣不如東郭牙]”라고 하였다.
망구빈지신홀 독원구전[望九賓之紳笏 獨遠句傳] 왕안석(王安石) 하남교례필사사표(賀南郊禮畢肆赦表)에 “구빈(九賓)의 신홀(紳笏)을 홀로 멀리서 바라보며 이 표(表)를 올리고, 산림(山林)에서 온갖 짐승들을 길들여 순종하게 하면서 이들을 이끌고 춤추는 태평성세(太平盛世)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나이다.[望九賓之紳笏. 獨遠句傳. 狎百獸於山林, 猶知率舞.]”라고 하였고, 한서(漢書) 역육주유숙손전(酈陸朱劉叔孫傳)에 “대행(大行)에는 구빈(九賓)을 두어 황제의 명령과 신하들의 상소를 전하게 했다.[大行設九賓 臚句傳]”고 하였는데, 그 주(註)에 “구빈(九賓)은 주례(周禮)의 구의(九儀)이니,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고(孤), 경(卿), 대부(大夫), 사(士)를 이른다.[九賓則周禮九儀也 謂公侯伯子男孤卿大夫士也]”라고 하였고, 또 “위에서 아래로 말을 전하여 알리는 것을 려(臚)라 하고, 아래에서 위로 보고하는 것을 구라(句) 한다.[上傳語告下爲臚 下告上爲句也]”라고 하였다.
망구순[望九旬] 아흔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여든 한 살의 이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