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의 몸이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드러냈기 때문이요
위탄의 묘가 종요에 의해 파헤쳐진 것은
자신이 이룬 아름다운 것을 숨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리에 밝은 사람은
대개 자질을 숨기고 재능을 감추며
지극한 경지에 이른 사람은
항상 훌륭함을 사양하고 좋은 것은 내놓는다.
楊修之軀見殺於曹操, 以露己之長也.
양수지구견살어조조, 이로기지장야.
韋誕之墓見伐於鐘繇, 以秘己之美也.
위탄지묘견벌어종요, 이비기지미야.
故哲士多匿采以韜光, 至人常遜美而公善.
고철사다닉채이도광, 지인상손미이공선.
<菜根譚채근담 淸刻本청각본(乾隆本건륭본) : 應酬응수>
- 양수[楊修/楊脩] 중국 후한(後漢) 헌제(獻帝) 때 조조(曹操)의 모사. 태위(太尉) 양표(楊彪)의 아들로, 박학하고 견식이 넓었다. 조조(曹操)의 주부(主簿)로 있으면서 조조와 재주를 겨루고, 조조의 뜻을 미리 알아맞혔다가 조조의 시기를 받아 살해되었다. 후한서(後漢書) 양웅열전(楊震列傳)에 “양수(楊修)는 자(字)가 덕조(德祖)이고, 학문을 좋아하고 뛰어난 재주가 있어 승상 조조(曹操)의 주부(主簿)가 되어 조조의 일을 도맡아 하였다. 조조가 한중(漢中)을 평정했을 때, 유비(劉備)를 토벌하려고 했는데 나아갈 수도 없었고, 지키려고 했지만 공을 이루기도 어려웠다. 호위군도 나아가고 물러남 가운데 무엇을 따라야 할지 알지 못하였다. 조조가 이에 군호를 내렸는데 ‘계륵(鷄肋)’이라고만 하였다. 조조 외에는 아무도 깨닫는 사람이 없었는데, 양수가 홀로 말하길 ‘닭갈비[鷄肋]란 것이, 먹으면 얻는 것이 없고, 버리면 아까운 것과 같으니, 공이(公) 돌아갈 계책을 결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바깥에 영을 내려 매우 엄중하게 하라고 하였고, 조조가 이에 군대를 돌렸다. 양수가 기미를 보고 결단함에 이런 예가 많았다. 또, 양수가 일찍이 길을 나섰는데, 조조에게 바깥일을 묻는 것이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이에 역으로 짐작하여 답할 것을 적어 집을 지키는 아이에게 이르기를 ‘만약 영이 나오는 것이 있으면, 순서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윽고 과연 이와 같은 일이 세 번 있었다. 조조가 그 속도를 괴이하게 여기고, 그를 염탐하도록 해서 상황을 알고는 이에 양수를 꺼렸다. 또 원술(袁術)의 조카였기 때문에, 후환이 될 것을 염려하였고, 마침내 일을 빌미로 그를 죽였다. [脩字德祖, 好學, 有俊才, 為丞相曹操主簿, 用事曹氏. 及操自平漢中, 欲因討劉備而不得進, 欲守之又難為功, 護軍不知進止何依. 操於是出教, 唯曰: ‘雞肋.’而已. 外曹莫能曉, 脩獨曰: ‘夫雞肋, 食之則無所得, 棄之則如可惜, 公歸計決矣.’ 乃令外白稍嚴, 操於此迴師. 脩之幾決, 多有此類. 脩又甞出行, 籌操有問外事, 乃逆為荅記, 勑守舍兒: ‘若有令出, 依次通之.’ 旣而果然. 如是者三, 操怪其速, 使廉之, 知狀, 於此忌脩. 且以袁術之甥, 慮為後患, 遂因事殺之.]”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楊脩> <三國志 魏書 卷21 王粲傳 楊修>
- 견살[見殺] 죽임을 당함. 피살(被殺).
- 조조[曹操] 동한(東漢: 후한後漢) 말의 정치가이자 문학가이다. 자는 맹덕(孟德)이며 소자(小字)는 아만(阿瞞)이다. 패국(沛國) 초현(譙縣) 사람이다. 동한 말에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헌제(獻帝) 건안(建安) 원년(196)에 헌제를 자신의 근거지인 허도(許都)로 옮겨온 뒤 천자의 명의를 빌려 원소(袁紹), 원술(袁術), 여포(呂布), 유표(劉表), 마초(馬超), 한수(韓遂) 등의 할거 세력을 제거하고, 대외적으로는 남흉노(南匈奴), 오환(烏桓), 선비(鮮卑) 등을 복속시켜 북방을 통일하였다. 건안(建安) 13년(208)에 승상이 되어 군대를 끌고 남하하였다가 적벽(赤壁)에서 손권(孫權)과 유비(劉備)의 연합군에게 대패하였다. 이후 위왕(魏王)에 봉해졌다. 민생에 힘을 씀으로써 조위(曹魏) 건립의 기초를 닦았다. 조위가 건립된 뒤 아들 조비(曹丕)에 의해 무황제(武皇帝)로 추존되었다. 시호는 무(武), 묘호는 태조(太祖)이다. 역대 명인(名人)들의 조조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후하나, 남송의 학자 윤기신(尹起莘)은 “역적 왕망(王莽)이 한(漢)나라를 찬탈할 때에 그 구실을 찾고자 하였으나 찾지 못하자 주공(周公)이 거섭(居攝)한 것을 칭탁하였는데, 조조와 조비에 이르게 되자 처음으로 제위를 양위하는 것으로 문식하였다. 이후로 찬탈과 도적질이 이어졌는데 모두 이를 뒤따라 행하였으니, 그 근원은 조씨의 나쁜 전례에서 시작되었다.[莽賊簒漢 欲求其說而不可得 乃以周公居攝稱之 至操丕 始以傳禪爲文 自後簒竊相繼 皆踵而行之 其原起於曹氏之作俑也]”라고 하였다.
- 조조[曹操] 후한(後漢) 말의 정치가이다. 패국(沛國) 초현(譙縣) 사람으로 위(魏)나라 건국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권모(權謀)에 능(能)하고 시문(詩文)을 잘하였다. 자(字)는 맹덕(孟德), 아명(兒名)은 아만(阿瞞)·길리(吉利), 시호는 무황제(武皇帝), 별칭은 위 무제(魏武帝)다. 환관(宦官)의 양아들로, 후한(後漢) 말기 황건적(黃巾賊)의 난에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여러 군벌들을 차례로 평정하고 이후 승승장구하여 헌제(獻帝) 때 승상(丞相)이 되어 정권(政權)을 전단(專斷)하고 위왕(魏王)에 봉해졌다. 정치상 실권을 잡았으나 제위에는 오르지 않았고, 낙양(洛陽)에서 죽었다. 뒤에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후한을 찬탈하고 위(魏)나라 황제가 된 뒤에 태조(太祖) 무제(武帝)로 추존되었다. 후한(後漢) 헌제(獻帝) 건안(建安) 13년(208)에, 조조(曹操)가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유비(劉備)와 손권(孫權)의 연합군과 맞선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대패하고, 이로부터 위(魏)・촉(蜀)・오(吳) 삼국(三國)이 정립(鼎立)하게 되었다. 한편 조조(曹操)는 건안시대(建安時代) 가장 뛰어난 문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많은 문학 작품을 남겼으며, 때로는 창을 비껴들고 시(詩)를 지어 읊기도 하였다. 후한 때 정확한 인물평으로 유명했던 허소(許劭, 150~195)는 “태평시대의 간사한 적이요, 어지러운 세상의 영웅이다.[淸平之姦賊, 亂世之英雄.]”라고 평하였다.
- 위탄[韋誕] 삼국 시대 위(魏)나라 경조인(京兆人)으로 자(字)는 중장(仲將)이다. 위단(韋端)의 아들이다. 문재(文才)가 있어 사장(辭章)을 능하였고 또 선서(善書)로 이름났다. 한헌제(漢獻帝) 건안(建安) 연간에 군상계리(郡上計吏)로 낭중(郎中)이 되었다. 위명제(魏明帝) 태화(太和) 연간에 무도태수(武都太守)가 되고, 태화(太和) 중에 능서(能書)로써 시중(侍中)에 보직되어 관은 광록대부(光祿大夫)로 마쳤다. 벼슬이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이르렀다. 글씨는 장지(張芝)와 한단순(邯鄲淳)을 본받았는데, 모든 서체에 능했다. 특히 큰 글자를 잘 써 위(魏)나라 왕실의 보기명제(寶器銘題)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서예에 관한 용품에도 관심을 기울여 특히 제묵(製墨)을 잘하였으므로 그가 만든 묵을 세상에서 중장묵(仲將墨)이라 칭했었다. 세상에서 “중장이 만든 먹은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옻칠과 같다.[仲將之墨, 一點如漆.]”고 하였다. 당(唐)나라 위속(韋續)이 지은 묵수(墨藪) 권1에 “위(魏)나라의 종요(鍾繇)는 위탄(韋誕)에게서 채옹(蔡邕)의 필법을 보고는 이것을 탐하여 3일 동안 자신의 가슴을 쳐서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때문에 피를 토하였는데 위 태조(魏太祖)가 오령단(五靈丹)을 주어 생명을 구하니 살아나게 되었다. 종요가 채옹의 필법을 요구하였으나 위탄은 끝내 주지 않았다. 위탄이 죽자 종요는 사람을 시켜 위탄의 무덤을 도굴하여 끝내 이를 얻었다.[魏鍾繇見蔡邕筆法於韋誕, 自槌三日, 胸盡靑, 因嘔血. 魏太祖以五靈丹救之得活, 繇求之不與, 及誕死, 繇令人盜掘其墓, 而得之.]”라는 내용이 보이고, 세설신어(世說新語) 교예(巧藝)에 “위중장(偉仲將)은 글씨를 잘 썼는데, 위 명제(魏明帝)가 궁전을 세우고 편액을 달려고 중장(仲將)으로 하여금 사다리에 올라가 글씨를 쓰게 하였다. 다 쓰고 내려오니 머리털과 귀밑머리가 허옇게 되어, 자손들에게 다시는 글씨를 배우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韋仲將能書. 魏明帝起殿, 欲安榜, 使仲將登梯題之. 既下, 頭鬢皓然, 因敕兒孫: ‘勿復學書.’]”라고 하였는데, 유효표(劉孝標)의 주(注)에 문장서록(文章敍錄)를 인용하여 “위탄(韋誕)은 자(字)가 중장(仲將)이고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이다.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지내다 죽었다.[韋誕字仲將, 京兆杜陵人, 太僕端子. 有文學, 善屬辭. 以光祿大夫卒.]”라고 하였고, 위항(衛恒)의 사체서세(四體書勢)를 인용하여 “위탄(韋誕)은 해서(楷書)를 잘 써서, 위(魏)나라 궁전과 누각의 글씨는 위탄(韋誕)이 쓴 것이 대부분이었다. 명제(明帝)가 능소관(陵霄觀)을 세웠는데 잘못하여 글씨도 쓰기 전에 편액을 먼저 달아버렸다. 그래서 바구니에 위탄(韋誕)을 태우고 도르래에 긴 밧줄을 달아 끌어올려서 글씨를 쓰게 하였다. 땅으로부터 25장(丈)이나 떨어져 올라가자 위탄(韋誕)은 몹시 겁이 났다. 이에 자손들에게 이런 해서(楷書)를 쓰는 법은 그만두라고 훈계하였고, 또 그것을 가훈으로 삼았다.[誕善楷書, 魏宮觀多誕所題. 明帝立陵霄觀, 誤先釘榜, 乃籠盛誕, 轆轤長絙引上, 使就題之. 去地二十五丈, 誕甚危懼. 乃戒子孫, 絕此楷法, 箸之家令.]”라고 하였다. 또, 세설신어(世說新語) 방정(方正)의 주(注)에서는 송 명제(宋明帝)의 문장지(文章志)를 인용하여 “태원(太元) 연간에 새 궁전이 완성되자 건의한 사람들은 왕헌지(王獻之)를 굴복시켜 편액에 글씨를 쓰게 하여 만대의 보물로 삼고 싶어 했다. 사안(謝安)이 왕헌지(王獻之)와 얘기하던 차에, 魏(魏)나라 때 능운각(陵雲閣)을 지으면서 편액에 글씨 쓰는 것을 잊어버려, 위탄(韋誕)으로 하여금 사다리에 매달려 올라가 글씨를 쓰게 하였으며, 내려올 때에는 수염과 머리카락이 다 백발이 되었고 겨우 숨이 붙어 있었는데, 돌아가서 자제(子弟)들에게 ‘해서(楷書) 쓰는 법은 그만두어야 한다.’라고 말했던 일을 언급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움직여보려 하였다. 왕헌지(王獻之)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 정색을 하며 말하기를 ‘참 이상한 일이군요! 위탄(韋誕)은 위(魏)나라의 대신(大臣)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시킬 수가 있을까요! 위(魏)나라가 오래가지 못한 것도 그 까닭이 있군요.’라고 하였다. 사안(謝安)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太原中, 新宮成, 議者欲屈王獻之題榜, 以爲萬代寶. 謝安與王語次, 因及魏時起陵雲閣忘題榜, 乃使韋仲將縣梯上題之. 比下, 鬚髮盡白, 裁餘氣息. 還語子弟云: ‘宜絶楷法!’ 安欲以此風動其意. 王解其旨, 正色曰: ‘此奇事. 韋仲將魏朝大臣, 寧可使其若此? 有以知魏德之不長.’ 安知其心, 迺不復逼之.]”라고 하였다.
- 견벌[見伐] 베임을 당함. 무너뜨림을 당하다.
- 종요[鍾繇/鐘繇] 중국 삼국 시대 위(魏)나라 정치가이자 서예가로, 예주(豫州) 영천(穎川) 장사(長社: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장갈長葛) 사람이다. 자(字)는 원상(元常)이며 시호는 성(成)이다. 한나라 말기에 효렴(孝濂)으로 천거되어 벼슬하였으며, 조조(曹操)가 정권을 장악했을 적에 관중(關中) 지방을 수비하고 크게 공을 세웠으며, 위(魏)나라에서는 이후 정위(廷尉)와 상국(相國), 태부(太傅) 등의 관직을 지냈으며, 조비(曹丕)가 즉위한 후에 태위(太尉)가 되어 사도화흠(司徒華歆), 사공왕랑(司空王朗)과 함께 삼공(三公)으로 병칭되었고, 정릉후(定陵侯)에 봉해졌다. 팔분체(八分體)에 능하였다. 호소(胡昭)와 함께 유덕승(劉德升)에게 글씨를 배웠다. 특이한 필체를 구사한 그는 특히 예서(隷書), 초서(草書), 행서(行書)에 능하였으며, 특히 해서체의 일종인 소해(小楷)의 창시자로서 해서비조(楷書鼻祖)라 불리며 후대 서법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예세(隸勢)라는 글을 지어 예서(隸書)를 쓰는 방법과 자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서법으로는 호소(胡昭)와 더불어 호비종수(胡肥鍾瘦)라고 일컬어졌고, 왕희지(王羲之)와 함께 종왕(鍾王)으로 병칭되었으며, 서체는 종체(鍾體)로 불렸다. 위부인(衛夫人)으로 불리는 위삭(衛鑠)과 왕희지(王羲之)가 그의 서법을 이었다. 왕희지(王羲之)는 특히 그의 글씨를 존숭하였다. 필적으로 선시표(宣示表), 하첩표(賀捷表), 천계직표(薦季直表) 등이 있다. 당(唐)나라 위속(韋續)이 지은 묵수(墨藪)에 “위(魏)나라의 종요(鍾繇)는 위탄(韋誕)에게서 채옹(蔡邕)의 필법을 보고는 이것을 탐하여 3일 동안 스스로 가슴을 쳐서 온통 퍼렇게 멍이 들고, 이 때문에 피를 토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위 태조(魏太祖)가 오령단(五靈丹)을 먹여 생명을 구해주었다. 종요(鍾繇)가 채옹(蔡邕)의 필법을 요구하였으나 위탄(韋誕)은 끝내 주지 않았다. 마침내 위탄(韋誕)이 죽자, 종요(鍾繇)가 사람을 시켜 위탄(韋誕)의 무덤을 도굴하여 끝내 이를 얻었다.[魏鍾繇見蔡邕筆法於韋誕, 自槌三日, 胸盡靑, 因嘔血. 魏太祖以五靈丹救之得活, 繇求之不與, 及誕死, 繇令人盜掘其墓, 而得之.]”라고 보이는데, 위탄(韋誕)은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문신으로 자(字)가 중장(仲將)이며 경조(京兆) 사람이다. 문재(文才)가 있어 사장(辭章)에 능하고 서예에 뛰어났으며 벼슬이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이르렀다. 위 태조(魏太祖)는 조조(曹操)의 묘호(廟號)로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한(漢)나라를 멸망시키고 황제가 되어 무제(武帝)로 추존하고 묘호(廟號)를 태조(太祖)라 하였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 석창서취묵당(石蒼舒醉墨堂)에 “종요(鍾繇)와 장지(張芝)에 뒤지지 않는다고 그대 자부하는데, 나 역시 나휘나 조습에 비한다면 우월하다오.[不減鍾張君自足, 下方羅趙我亦優.]”라고 하였고, 소식(蘇軾)이 서법가(書法家)인 당(唐)나라의 장욱(張旭)과 회소법사(懷素法師)의 글씨를 진(晉)나라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에 비교하면서 제왕일소첩(題王逸少帖)이라는 시에 “마치 저잣거리 창부(娼婦)가 청홍의 분을 얼굴에 찍어 바르고는, 속된 노래와 춤을 추며 아동을 현혹하는 것 같다.[有如市娼抹靑紅, 妖歌嫚舞眩兒童.]”고 비평한 시구가 있고, 왕희지(王羲之)의 필경(筆經)에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장지와 종요가 서수필을 사용했는데, 서수필은 붓끝이 아주 강강하여 칼끝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한다.[世傳張芝鍾繇用鼠鬚筆, 筆鋒勁强有鋒芒.]”라고 한 데서 보인다.
- 제미[濟美] 미(美)를 성취함, 조상의 유업을 이어 이를 성취함. 아름다운 일을 이룬다는 뜻으로, 조상이 남겨 놓은 일을 이어받아 성취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전의 기초 위에 아름다운 것을 발양하여 크게 빛낸다는 말로, 후세가 앞 세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한다는 말. 제미(濟美)는 후계자가 전인의 업적을 계승하여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우수한 자제를 칭찬할 때 곧잘 쓴다. 좋은 일을 해내다. 자손이 조상의 사업을 이어받아 완성하고 잘 지키다. 참고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8년 조에 “선대의 미덕을 계승하여, 그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았다.[世濟其美, 不隕其名.]”라고 한 데서 보인다.
- 철사[哲士] 어질고 밝은 선비. 어질고 현명한 선비. 참고로, 당나라의 대문호인 한유(韓愈)가 792년 진사에 합격한 후 이부(吏部)의 삼시(三試)에 떨어졌을 때 최입지(崔立之)가 편지를 보내 위로했는데, 이에 대한 답장에 “장차 한적한 들에서 밭을 갈고 적막한 물가에서 낚시질을 하며 국가의 유사를 구하고, 현인과 명철한 선비의 끝과 처음을 상고하여 당나라의 경 한 질을 편찬하여 길이 남기겠다.[將耕於寬閑之野, 釣於寂寞之濱, 求國家遺事, 考賢人哲士之終始, 作唐之一經, 垂之無窮.]”라고 한 데서 보인다. <昌黎文集 卷16 答崔立之書>
- 명철[明哲] 세태나 사리에 밝음. 현명하고 사리에 밝음, 또는 그 사람. 서경(書經) 열명 상(說命上)에 “사태를 잘 파악하는 사람을 명철하다고 하니, 명철한 사람이 실로 모범이 되는 것이다.[知之曰明哲, 明哲實作則.]”라고 하였고, 시경(詩經) 대아(大雅) 증민(蒸民)에 “이미 사리에 밝고 또 일에 밝아 그 몸을 보전하도다.[旣明且哲 ,以保其身.]”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집전에 “명은 이치에 밝은 것을 이르고, 철은 일에 자세히 아는 것을 이른다.[明謂明於理, 哲謂察於事.]”라고 하였고, “명철이란 안전한 것을 택하고 위험한 것을 버려 그 몸을 온전히 잘 보존하는 것이다.[明哲謂擇安去危善全其身]”라고 하였으니,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준말로 난세(亂世)에 함부로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몸을 보전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즉, 자기 신명(身命)을 보전하는 데 명철하다는 뜻이다.
- 익채[匿采] 문채(文彩/文采)를 감춤. 아름다운 광채를 감춤.
- 도광[韜光] 빛을 감춘다는 뜻으로, 학식(學識)이나 재능(才能)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지 않음을 이른다. 빛을 감추어 밖에 나타내지 않음. 재능이나 지혜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숨김. 광채를 감추다. 재주를 감추고 나타내지 않다. 도광양회(韜光養晦).
- 도광양회[韜光養晦] 자신의 재능(才能)이나 명성(名聲)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는 뜻으로, 1980년대 중국(中國)의 대외(對外) 정책(政策)을 일컫는 용어(用語)이다. 참고로, 시경(詩經) 주송(周頌) 작(酌)에 “아, 성대한 왕의 군대로서 따라 기르며 때로 숨겨, 이에 크게 빛나자 이에 큰 갑옷을 사용했다.[於鑠王師, 遵養時晦. 時純熙矣, 是用大介.]”라고 보이는데, 주자는 집전(集傳)에서 “이 또한 무왕을 칭송한 시로, 무왕이 처음에 성대한 군사를 보유하였으나 물러나 스스로 도(道)를 따라 힘을 길러서 때와 함께 모두 감추었다가, 이미 크게 빛나자 그런 뒤에 한번 군복을 입어 천하(天下)가 크게 안정되었음을 말한 것이다.[此亦頌武王之詩, 言其初有於鑠之師而不用, 退自循養, 與時皆晦, 旣純光矣, 然後, 一戎衣而天下大定.]”라고 해석하였다.
- 지인[至人] 도의 극치에 이른 사람. 도덕(道德)이 극치(極致)에 이른 사람. 덕이 지극히 높은 사람. 진인(眞人). 지인(至人)은 도가(道家)에서는 세속을 초월한 무아(無我)의 경지에 오른 사람을 의미하며, 순자(荀子)에서는 사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한 사람을 가리킨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지인은 신묘하고 측량할 수 없다. 큰 연못을 태워버릴 뜨거운 불도 그를 뜨겁게 할 수 없고, 황하와 한수를 얼어붙게 할 추위도 그를 춥게 할 수 없으며, 산을 깨트리는 빠른 우레나 바다를 흔들어놓는 거센 바람도 그를 놀라게 할 수 없다.[至人神矣! 大澤焚而不能熱, 河漢沍而不能寒, 疾雷破山, 風振海而不能驚.]”라는 말이 나오고, 순자(荀子) 천론(天論)에 “그러므로 자연계의 법칙과 사람이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지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故明於天人之分, 則可謂至人矣]”라고 하였다. 참고로 후한서(後漢書) 권79 중장통 열전(仲長統列傳)에 “지인은 마음대로 변하고 달사는 세속에서 벗어난다.[至人能變, 達士拔俗.]”라고 하였다. 또, 가의(賈誼)의 복조부(鵩鳥賦)에 “지덕이 있는 사람은 세상의 물을 초탈하여, 홀로 도와 함께하도다.[至人遺物, 獨與道俱.]”라고 하였고, 주희(朱熹)의 시 감흥(感興)에 “본성을 지닌 훌륭한 사람은, 동정에 관계없이 그대로라네. 진주가 있는 못은 저절로 아름답고, 옥을 품고 있는 산은 빛을 머금었다.[至人秉元化, 動靜體無違. 珠藏澤自媚, 玉韞山含輝.]”라고 한 데서 보인다.
- 지인[至人] 지극히 덕(德)이 높은 사람. 더없이 덕(德)이 높은 사람. 지인(至人)은 보통 도덕(道德)과 수양(修養)이 극치(極致)에 이른 사람을 이르는데, 도가(道家)에서는 영극(靈極)에 도달하여 진여(眞如)를 잃지 않는 사람. 즉, 덕(德)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고, 이치를 온전히 깨달아 세속에 구애되지 않고 무심(無心)에 노니는 경지로 성인(聖人)보다 더 높다고 한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지인은 자기를 내세우지 아니하고, 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공을 내세우지 아니하며, 성인은 이름을 얻고자 하는 생각이 없다.[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라고 하여 지인, 신인, 성인을 구분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또, 황제내경(黃帝內經) 상고천진론편 제1(上古天眞論篇第一)에 “황제가 말하기를 …… 중고 시대에는 지인이 있었는데, 그는 도덕을 잘 지켰고 음양에 조화를 이루었고, 사철의 기후에 맞게 생활하였고, 세상풍속을 떠나서 정을 간직하고 신을 온전히 하여 천지 사이를 오갈 수 있었으며 먼 곳까지 보고 들었다. 이에 그는 오래 살게 되고 건강해서 역시 진인과 같이 되었다.[黃帝曰 …… 中古之時, 有至人者, 淳德全道, 和於陰陽, 調於四時, 去世離俗, 積精全神, 游行天地之間, 視聽八達之外, 此蓋益其壽命而强者也, 亦歸於眞人.]”라고 하였다.
- 손미[遜美] 아름다움을 낮추다. 아름다움을 겸손히 감추다. 뛰어남을 양보하다. 훌륭함을 사양하다.
- 공선[公善] 공공(公共)을 위한 선(善). 공의 선행. 사회 전체를 위한 착한 일. 공공의 이익을 위한 좋은 일. 좋은 것을 숨김없이 드러냄. 모두를 위한 착한 행동. 공평하게 선을 행하다.
【譯文】 匿以韜光, 遜而公善.
楊修的身軀被曹操殺害, 因爲顯露了自己的長處 ; 韋誕的墳墓被鍾繇盜伐, 因爲秘藏了自己的濟美. 所以, 賢哲人士大多隱匿華采以韜光養晦, 至德人士常常遜讓美好而公共美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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