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서[望舒] 달의 어자(御者). 달이 탄 수레를 모는 선인(仙人)의 이름인데, 보통 달을 지칭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앞에는 망서(望舒)로 하여금 먼저 달려가도록 하고, 뒤에는 비렴(飛廉)으로 하여금 쫓아가게 하였도다. 봉황새는 날 위해 후환에 대비하고, 천둥 신은 나에게 준비 안 됐다 하네.[前望舒使先驅兮, 後飛廉使奔屬. 鸞皇爲余先戒兮, 雷師告余以未具.]”라고 하였는데, 왕일(王逸)의 주(注)에 “망서는 달의 마부이다.[望舒, 月御也.]”라고 하였다.
망서[亡書] 진 시황(秦始皇) 때 분서(焚書)로 인하여 산실(散失)된 서적을 말한다.
망서초[望舒草] 대망서(戴望舒)는 현대시파(現代詩派)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중국의 시인이다. 항일전(抗日戰)이 벌어진 후에 시풍(詩風)이 일변하여 홍콩[香港]에서 항전시(抗戰詩)를 발표했다. 초기에는 마르크스주의 문학논총(文學論叢)의 편집·번역에도 관여하였으나, 작품은 프랑스 상징시의 영향을 받은 관념적·신비적인 시가 많다. 시집에는 「나의 기억」(1931) 「망서초(望舒草)」(1934) 등이 있다.
망선대[望仙臺] 한 무제(漢武帝) 때의 누대 이름이다.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 “하남도 섬주 섬현의 망선대는 현(縣) 서남쪽 13리 지점에 있다. 한 문제(漢文帝)가 대를 쌓아 하상공(河上公)을 바라보았다. 하상공이 이미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이 대를 쌓아 그를 바라보면서 제사한 것이다.[河南道陝州陝縣, 望仙臺在縣西南十三里, 漢文帝築以望河上公. 公旣上昇, 故築此臺以望祭之.]”라고 하였다.
망선루[望仙樓] 당나라 궁중에 있던 누대 이름으로, 당 무종(唐武宗) 회창(會昌) 5년(845)에 세워졌다.
망선루[望仙樓] 원래 청주목(淸州牧)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었는데, 옛 이름은 취경루(聚景樓)이다. 오래되어 퇴락되었던 망루는 1461년(세조7)에 목사 이백상(李伯常)이 새로이 중수하고 한명회(韓明澮)가 누각의 편액을 고쳐서 망선루(望仙樓)라 하였다.
망선정[望鮮亭] 한서(漢書)에는 낙선정(樂鮮亭)으로 되어 있다.
망성[望姓] 이름 높은 양반 성씨.
망세[望歲] 망세(望歲)는 농부가 풍년을 바란다는 뜻인데, 훌륭한 인물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哀公) 16년에, 백공 승(白公 勝)이 초(楚)나라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초나라 대부 섭공 자고(葉公子高)가 난을 진압하러 들어가니, 어떤 사람이 “나라 사람들이 당신이 오기를 바라는 것이 풍년을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國人望君如望歲焉.]”라고 하였다는 데서 온 말이다.
망세[忘勢] 세력을 잊음. 권세를 잊음.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맹자가 “옛날 어진 군왕들은 선을 좋아하고 세력을 잊었으니, 옛 현사가 어찌 홀로 그렇지 않았겠는가. 그 도를 즐거워하고 남의 세력을 잊었다.[古之賢王, 好善而忘勢, 古之賢士, 何獨不然? 樂其道而忘人之勢.]”라고 하였다.
망세[忘世] 세정(世情)을 잊는다는 뜻으로, 세속을 초탈함을 의미한다. 참고로,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공자가 위(衛)나라에서 경쇠를 치고 있을 때에 마침 삼태기를 메고 그 집 앞을 지나던 사람이 세상일에 연연해한다며 공자를 비판하자, 공자가 그를 두고 “과감하도다, 어려울 것이 없겠구나.[果哉! 末之難矣.]”라고 하였는데, 그에 대한 주희(朱熹)는 집주(集註)에 “과감하다는 것은 그가 세상을 잊는 데 과감함을 탄식한 것이다.[果哉, 歎其果於忘世也.]”라고 한 데서 보인다.
망세간지갑자[忘世間之甲子] 술이 잔뜩 취(醉)하여 세상일을 모름. 술에 취하여 만사(萬事)를 잊음. 일에 골몰(汨沒)하여 세월(歲月)이 가는 줄을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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