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진막급[望塵莫及] 먼지를 바라보고 미치지 못한다.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미쳐 따라잡을 수 없다. 지나치게 뒤떨어져 따라 잡을 수 없다. 망진불급(望塵不及).
망진봉[望晉峰] 경상도 진주(晉州)에 있는 산의 이름이다.
망진봉수대[望津烽燧臺] 망진산 봉수대로, 현재 진주시 망경동에 있다.
망진불급[望塵不及]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미쳐 따라잡을 수 없다는 뜻으로 지나치게 뒤떨어져 따라잡을 수 없다는 말이다. 사람을 쫓아가다 따라잡지 못한 것을 가리켰는데, 오늘날에는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을 경우를 비유하는 말로도 사용되고 있다. 후한서(後漢書) 조자전(趙咨傳)에 “동한 시대, 조고(曹暠)는 돈황(敦煌)태수 조자(趙咨)의 효렴과(孝廉科) 추천을 통해 형양(滎陽) 현령이 되었다. 그 후 조자가 동해(東海)로 발령이 나 부임하러 가는 길에 형양을 지나가게 되었다. 조고는 그를 길에서라도 맞이하여 인사를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조자는 머무르지 않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 버렸다. 조고는 10리 밖의 정(亭)까지라도 배웅하기 위해 쫓아갔으나 조자의 수레가 일으키는 먼지만 바라볼 수 있을 뿐 쫓아갈 수가 없었다.[令敦煌曹暠, 咨之故孝廉也. 迎路謁候, 咨不爲留, 暠送至亭次, 望塵不及.]”라고 한 데서 보인다. 효렴과(孝廉科)란 한(漢)나라의 인재 선발 제도인 찰거제(察擧制)의 주요 과목으로, 지방 장관들이 자기 관내의 효자(孝子)와 염리(廉吏)를 천거하는 것을 말한다. 찰거제(察擧制)란 한무제(漢武帝)가 확립한 제도로, 인재를 살펴서 천거하는 제도를 말한다. 또, 남사(南史) 오경지전(吳慶之傳)에 보이는데, 남북조시대 남조(南朝)의 송(宋)나라 복양(濮陽) 사람 오경지(吳慶之)는 학문이 깊고 인격이 고매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왕의공(王義恭)이 양주(揚州) 태수로 부임하면서 오경지에게 자기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오경지는 태수가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것이 고맙고 기뻐 서슴없이 그의 요청을 수락하고 출사했다. 그런데 후에 왕의공이 업무상의 과실로 인해 중앙정부로부터 탄핵을 받고 처형되고 말았다. 오경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에게는 사람을 보좌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오경지는 관직을 떠나 초야에 묻히려고 하였다. 그러던 차에 왕곤(王琨)이 오흥(吳興) 태수로 부임하면서 오경지를 불러 공조(工曹)의 자리를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오경지는 “‘제게 관직을 다시 맡아 달라고 하는 것은 물고기를 나무 위에서 기르고 새를 우물 속에서 기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라 하고는 인사도 없이 황망히 그 자리를 떠났다. 왕곤이 급히 일어나 뒤따라가 사과하려고 했지만 길에는 흙먼지만 보일 뿐,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若欲見吏, 則是蓄魚於樹, 栖鳥於泉耳. 不辭而退, 琨追謝之, 望塵不及.]”라고 한 데서 보인다. 망진막급(望塵莫及).
망진산[望晉山] 경상남도 진주시 망경동(望京洞)에 있는 산이다.
망진이배[望塵而拜] 지위나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을 이른다. 또는, 남에게 뒤지는 것을 이른다. 진(晉)나라 반악(潘岳)이 세상의 명리를 좇은 나머지, 석숭(石崇) 등과 함께 당시의 권신(權臣)인 가밀(賈謐)에게 아첨하면서, 가밀이 외출할 때마다 수레가 일으키는 먼지를 바라보며 절을 했다[望塵而拜]는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 권55 반악전(潘岳傳)에 “반악(潘岳)은 성미(性味)가 경솔(輕率)하고 조급(躁急)하며 세상의 이익을 좇았다. 위위(衛尉)인 석숭(石崇) 등과 더불어 가밀(賈謐)을 아첨으로 섬겨서 늘 그가 외출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석숭과 번번이 수레의 먼지를 바라보며 절을 했다.[岳性輕躁, 趨世利, 與石崇等諂事賈謐, 每候其出, 與崇輒望塵而拜.]”라고 하였다.
망진자호[亡秦者胡] 진 시황(秦始皇) 32년에 동방의 해상에서 온 연(燕)나라 방사(方士) 노생(盧生)이 귀신의 말이라 하면서 녹도서(錄圖書)를 바쳤는데, 그 속에 “진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호이다.[亡秦者胡也.]”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진 시황은 호(胡)를 북쪽의 오랑캐[北胡]로 알고는 몽염(蒙恬)에게 30만 대군을 이끌고 가서 토벌한 뒤 만리장성을 쌓게 하였다. 진 시황이 죽은 뒤에 간신 조고(趙高)가 진 시황의 큰아들 부소(扶蘇)를 죽이고 작은아들인 호해(胡亥)를 세웠는데, 호해는 간신들의 농간에 놀아나다가 결국 진나라를 망하게 하고 말았다. 즉 진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던 호(胡)는 북방 오랑캐의 호(胡)가 아니라 자신의 슬하에 있는 작은아들 호해의 호(胡)였던 것이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조고(趙高)는 진나라 때의 환자(宦者)로 권력을 전횡하였고, 호해(湖亥)는 시황제를 이은 진나라 2대 황제로 ‘이세황제(二世皇帝)’ 혹은 ‘진 이세(秦二世)’라고 불린다. 당시 조고는 자신의 위상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험하였는데, 호해에게 사슴을 바치며 말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따르지 않는 대신(大臣)들을 가려냈다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망진자호[亡秦者胡] 진시황(秦始皇) 32년에 동방의 해상에서 온 연인(燕人) 노생(盧生)이 녹도서(錄圖書)를 바쳤는데, 거기에 “진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호이다.[亡秦者胡也]”라는 말이 있었다. 이 예언으로 인해 진시황은 오랑캐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정현(鄭玄)은 “호(胡)는 호해(胡亥)이니, 이세황제(二世皇帝)의 이름이다. 진(秦)나라가 도참서(圖讖書)를 보고 이것이 사람 이름인 줄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북방의 호(胡)를 대비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도참서의 내용은 본래 신빙할 수가 없고 호(胡)를 호해(胡亥)라고 한 것도 후인들이 부회(附會)한 말이다. 시황제(始皇帝)가 본래 북방의 호(胡)를 치고자 하였으므로 도참서의 내용에 의탁하여 자신의 뜻을 행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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