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후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큰 일을 맡길 수 있으니
한나라 왕조를 안정시킨 이는 필연코 강후였고
신중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큰 공을 이룰 수 있으니
한나라 왕조를 일으킨 사람은 필연코 무후였다.
敦厚之人, 始可托大事, 故安劉氏者, 必絳侯也.
돈후지인, 시가탁대사, 고안유씨자, 필강후야.
謹愼之人, 方能成大功, 故興漢室者, 必武侯也.
근신지인, 방능성대공, 고흥한실자, 필무후야.
<圍爐夜話위로야화>
- 돈후[敦厚] 인정(人情)이 두터움. 친절하고 정중함. 인정이 두텁고 순박함. 성품이 진실하고 성실함. 성품이 도타움. 후덕함. 도탑고 성실하며 인자한 품성. 주희(朱熹)는 “후(厚)는 자질이 이처럼 박실(朴實)한 것이요, 돈(敦)은 그 중후함을 더욱 가하는 것이다.[厚是資質恁地朴實 敦是愈加他重厚]”라고 하였다. 참고로,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7장에 “군자는 덕성을 고양하고 문학을 말미암으니, 광대함을 지극히 하고 정미함을 다하며, 고명을 극진히 하고 중용을 따르며, 옛 것을 온습하고 새로운 것을 알며, 후함을 돈독히 하고 예를 높인다.[君子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 温故而知新, 敦厚以崇禮.]”라고 한 데서 보인다.
- 유씨[劉氏]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 한(漢)나라 황실. 참고로,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한 고조(漢高祖)가 죽은 뒤의 일을 묻는 여후(呂后)에게 “주발은 중후하기만 할 뿐 문채가 없으나, 그래도 유씨를 편안케 할 자는 반드시 주발일 것이다.[周勃重厚少文, 然安劉氏者必勃也.]”라고 고조가 대답한 고사가 있고,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죽기 전에 일찍이 백마를 죽여[刑白馬] 신하들과 맹약하면서 “유씨가 아닌 자가 왕이 된다면 천하가 함께 공격하라.[非劉氏而王, 天下共擊之.]”라고 하였다. 또, 왕릉(王陵)이 혜제(惠帝) 6년에 우승상(右丞相)이 되었는데, 혜제가 죽고 여후(呂后)가 여씨(呂氏)들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자 “고제(高帝)가 ‘유씨가 아닌데 왕이 될 경우에는 천하가 다 함께 공격하라.[非劉氏而王, 天下共擊之.]’고 하였다.”라면서 강력히 반대하였는데, 좌승상 진평(陳平)과 강후(絳侯) 주발(周勃)이 “안 될 것이 없다.[無所不可.]”라면서 여후의 뜻에 동의하자, 왕릉이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고제를 뵈려 하는가.[何面目見高帝地下.]”라고 그들을 면박(面駁)하니, 두 사람이 “지금 면절정쟁하는 것은 우리가 그대만 못하지만, 사직을 보전하고 유씨의 후손을 안정시키는 것은 그대가 또한 우리보다 못할 것이다.[於今面折廷爭, 臣不如君, 全社稷定劉氏後, 君亦不如臣.]”라고 답하고는, 그 뒤에 과연 여씨들을 멸망시킨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9 呂太后本紀>
- 강후[絳侯] 강후(絳侯)는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인 주발(周勃)의 봉호(封號)이다. 시호(諡號)는 무후(武侯)이다. 진(秦)나라 말에 옷감을 짜고 남의 장례에서 퉁소를 불어 주면서 생계를 꾸리다가 유방(劉邦)이 일어나자 그를 따라 진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항우(項羽)를 공격하여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고 고조(高祖)가 되는 데 일조하였다. 그 공로로 강후에 봉해졌다. 위인이 강직하고 돈후(敦厚)하여 유방이 큰일을 많이 맡겼으며, 유방이 일찍이 말하기를 “주발은 중후하고 학문은 없으나 유씨(劉氏)를 안정시킬 사람은 주발이 틀림없다.[周勃重厚少文, 然安劉氏者必勃也.]”고 하였다. 한 고조 사후에 여 태후(呂太后)가 정권을 잡고 여씨(呂氏)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는데, 여후(呂后)가 죽고 여녹(呂祿) 등 여씨(呂氏)들이 모반하였을 때 주발이 진평(陳平) 등과 같이 이들을 베어 한실(漢室)을 편안히 하였고, 한 문제(漢文帝)를 옹립하였다. 문제(文帝) 때 우승상(右丞相)이 되었다. 주발이 공이 높으면 재앙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승상에서 물러나 강현(絳縣)에 취임해 있다가 “주발이 모반(謀反)하려 한다.”는 어떤 자의 무고(誣告)로 인하여 무고하게 장안으로 체포되어 가서 조사를 받던 중, 어떻게 소명을 해야 할지 몰라서 옥리(獄吏)에게 천금을 주고 방도를 강구한 결과, 옥리가 문서의 뒷면에다 “공주로 증거를 대라.[以公主爲證.]”라는 말을 써서 보여주므로, 그의 말대로 공주를 증거로 삼아서 가까스로 용서를 받고 풀려나게 되었다. 공주는 바로 문제의 딸로 주발의 자부가 되었으므로, 그녀를 증거로 삼게 했던 것이다. 강후가 옥에서 풀려나며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백만 군대를 거느렸으나, 어찌 옥리가 귀한 줄을 알았겠는가![吾嘗將百萬軍, 然安知獄吏之貴乎!]”라고 하였다 한다. <史記 卷57 絳侯周勃世家><漢書 卷 40 周勃傳>
- 근신[謹愼/謹慎] 언행을 삼가고 조심함. 조심스럽고 신중함.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함. 벌(罰)로 일정 기간 동안 출근이나 등교, 집무(執務) 따위의 활동을 하지 아니하고 말이나 행동을 삼감.
- 한실[漢室] 한(漢)나라 황실을 일컫는 말. 한나라 황실을 의미하는 용어로, 주로 중국 한 왕조의 왕실이나 그 권위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참고로,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 환관들의 전횡을 막기 위해 진번(陳蕃)과 이응(李膺) 등이 대장군 두무(竇武)와 함께 환관을 모살(謀殺)하려다가 오히려 실패한 나머지 진번과 이응 등 100여 인이 피살을 당한 뒤를 이어 계속해서 사형과 유배를 당하고 수금된 자가 700여 인에 이르렀는데, 곽태(郭泰)가 당인(黨人)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서는 혼자서 그들을 위해 통곡하면서 “현인이 이제 사라졌으니 나라가 병들게 되었다는 시가 있는데, 이제 한나라도 망하게 되었구나.[人之云亡, 邦國殄瘁, 漢室亡矣.]”라고 탄식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資治通鑑 卷56 李靈皇帝 上之上> 인용한 시는 시경(詩經) 대아(大雅) 첨앙(瞻卬)의 구절이다.
- 무후[武侯] 무후(武侯)는 중국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승상(丞相)으로 무향후(武鄕侯)에 봉해진 제갈량(諸葛亮)을 이른다. 자(字)는 공명(孔明)이고, 시호(諡號)는 충무후(忠武侯)이다. 후한 말기의 난세를 피하여 남양(南陽)의 초려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그의 친구인 서서(徐庶)의 천거로 인해 한실(漢室)의 정통(正統)인 유비(劉備)의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정성에 감동하여, 유비(劉備)를 도와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曹操)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점령하였다. 마침내 촉한(蜀漢)을 건국하게 하고 인하여 한실(漢室)의 회복에 충성을 다했으며, 한(漢)나라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이 되었다. 유비를 도와 천하통일을 도모했으나 삼국정립(三國鼎立)의 형세에 그쳤고, 유비(劉備)가 죽은 뒤에는 다시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좌하여 국궁진췌(鞠躬盡瘁)하다가 9년 만에 진중(陣中)에서 전사하였다. 죽은 뒤에 백성들이 사당을 지어 제사를 받들었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傳> 제갈량(諸葛亮)이 한실(漢室)을 부흥하기 위해 중원(中原)을 북벌(北伐)할 적에 촉(蜀) 땅을 떠나면서 임금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가 유명한데 “출사표를 읽고서도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자는 충신이 아니다.[讀出師表不泣者非忠臣]”는 말이 전해 올 정도로 그 충성스러운 마음이 심금을 울리는 명문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전략가로 알려져 있다.
【譯文】 敦厚之人可托大事, 謹慎之人能成大功.
忠厚誠勢的人, 才可將大事託付給他, 因此能使漢朝天下安定的, 必定是周勃這個人. 惟有謹慎行事的人, 能建立大的功業, 因此能使漢室復興的, 必然是也明這般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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