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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고[埋蠱], 매고[枚皐], 매곡[昧谷], 매곡양곡[昧谷暘谷], 매곡읍[每曲揖]


매고[埋蠱]  남이 재앙을 받게 할 계획으로 그의 집에 고(蠱)라는 벌레를 묻는 것. 무술(巫術)로 저주하여 사람을 해치는 데에 사용하는 나무 인형 등을 묻어 두는 것. 증거를 날조하여 함정에 빠뜨리다.

매고[枚皐]  전한(前漢) 임회(臨淮) 회음(淮陰) 사람이다. 자는 소유(少孺)고, 매승(枚乘)의 첩의 아들이다. 해학과 재담을 잘 하고 사부(辭賦)를 잘 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동방삭(東方朔)과 비교하기도 했다. 처음에 양공왕(梁共王) 유매(劉買)를 섬겨 낭(郎)을 지냈다. 어떤 사건에 연좌되어 가실(家室)이 몰수되자 장안(長安)으로 달아났다. 무제(武帝) 때 글을 올려 스스로 매승(枚乘)의 아들이라 밝혀 사면을 받고 낭이 되었다. 일찍이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고, 무제를 따라 여러 지역을 순수(巡狩)했다. 경술(經術)에는 통하진 못했지만 회해(詼諧)를 좋아했으며, 문사(文思)가 민첩한 것으로 유명했다. 풍자적인 사부(辭賦)와 송(頌)에 능했는데, 무제가 그의 작품을 아주 좋아했다. 부(賦) 120여 편을 지었지만, 전하는 것은 많지 않다.

매고[枚皐]  한대(漢代)의 부송(賦頌)으로 유명했던 사람. 동방삭(東方朔)과 병칭(竝稱)되는 회학가(詼謔家). 한 무제(漢武帝) 때의 낭관(郞官)으로, 해학을 좋아하고 문사(文思)가 민첩하여 동방삭(東方朔)과 함께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한(漢) 나라 경제(景帝) 때의 저명한 문인 매승(枚乘)의 서자(庶子)이다. 어려서 아버지와 헤어져 어머니와 함께 곤궁하게 살다가, 나중에 대궐에 글을 올려 자신이 무제(武帝)가 초빙하고 싶어 하였으나 작고한 매승의 아들임을 밝힘으로써 벼슬을 얻게 되었다. 부송(賦頌)에 뛰어나고 또 글을 빨리 지었기 때문에 무제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漢書 卷51 枚皐傳>

매곡[昧谷]  해 지는 서쪽. 해가 지는 서쪽 골짜기.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화중(和仲)에게 나누어 명하여 서쪽에 머물게 하시니, 매곡(昧谷)이라 하는 곳이다. 들어가는 해를 공경히 전송하여 가을 수확을 고르게 하니, 밤은 중간이고 별은 허수(虛宿)이다. 알맞은 중추(仲秋)가 되면 백성들은 평화롭고 조수(鳥獸)는 털갈이를 하여 윤택해진다.[分命和仲宅西, 曰‘昧谷’. 寅餞納日, 平秩西成, 宵中星虛. 以殷仲秋, 厥民夷, 鳥獸毛毨.]”라고 하였다.

매곡서원[梅谷書院]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천천리에 있던 서원이다. 1694년(숙종20)에 송시열(宋時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는데, 1695년에 매곡(梅谷)이라고 사액되었다. 그 뒤 1724년(경종4) 사액이 취소되었다가, 1725년(영조1) 다시 사액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8)에 훼철되어 위패를 뒷산에 묻었다.

매곡성[梅瑴成]  청(淸)나라 초기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매문정(梅文鼎)의 손자이다. 강희(康熙) 황제에게 발탁되어 조정에 들어가 역상고성(曆象考成) 등의 편찬을 주도하였다.

매곡양곡[昧谷暘谷]  매곡(昧谷)과 양곡(暘谷). 매곡은 해가 지는 곳이고 양곡은 해가 뜨는 곳이다. 참고로, 서경(書經) 우서(虞書) 요전(堯典)에 “희중에게 나누어 명하여 우이에 머물게 하시니, 양곡이라고 하는 바, 나오는 해를 공경히 맞이하여 봄에 시작하는 일을 평질하니, 해는 중간이고 별은 조수(鳥宿)이다.[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寅賓出日, 平秩東作. 日中, 星鳥.]”라고 하였고, “화중에게 나누어 명하여 서쪽에 머물게 하시니, 매곡이라 하는 바로, 들어가는 해를 공경히 전송하여 가을에 수확하는 일을 평질하니, 밤은 중간이고 별은 허수(虛宿)이다.[分明和仲, 宅西, 曰昧谷. 寅餞納日, 平秩西成. 宵中, 星虛.]”라고 하였다. 또,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에 “해는 양곡에서 떠올라 함지에서 목욕한다.[日出於暘谷, 浴於咸池.]”라는 말이 나온다.

매곡읍[每曲揖]  매양 꺾이는 곳에서 읍을 함. 의례(儀禮) 사관례(士冠禮)에서 주인이 빈(賓) 및 빈의 찬자(贊者)를 맞이하여 묘 안으로 들어가 각자의 위치로 나아가는 절차를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경문(經文)에 “주인은 빈의 찬자에게 읍만 하고, 빈에게는 읍을 한 후에 묘문 안으로 들어갈 것을 청하고, 먼저 묘문 안으로 들어가 빈을 인도한다. 주인은 매번 꺾이는 곳에서 빈과 서로 읍을 한다.[主人揖贊者, 與賓揖, 先入. 每曲揖.]”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注)에 “주나라는 종묘를 왼쪽에 세웠는데, 외문 안으로 들어가 동쪽으로 꺾어지려는 곳에서 읍을 하고, 묘문 앞에 이르러 북쪽으로 꺾어지려는 곳에서 또 읍을 한다.[周左宗廟, 入外門, 將東曲, 揖, 直廟, 將北曲, 又揖.]”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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