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梅書] 동진(東晉) 때 매색(梅賾)이 위찬(僞撰)한 고문상서(古文尙書)를 가리킨다. 진(晉)나라 때 매색이 위찬(僞撰)한 책명으로 모두 46편이다. 한(漢)나라 때, 공안국(孔安國)이 황제의 명으로 공벽(孔壁)에서 나온 과두(蝌蚪) 문자로 된 고문상서(古文尙書)의 전(傳)을 내다가 마침 무고(巫蠱) 사건을 만나 미처 바치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 뒤 진(晉)나라 때 매색이 비로소 고문상서(古文尙書)를 발견했다 하여 나라에 바쳤으나, 실은 바로 그의 위작(僞作)이었다. 매색의 자는 중진(仲眞)이며, 벼슬은 예장 태수(豫章太守)를 지냈다. 필명(畢命)은 상서(尙書)의 편명이다.
매서[妹壻] 매부(妹夫). 매제(妹弟). 누이동생의 남편.
매서[枚筮] 점치다. 매서(枚筮)는 점치는 대상의 성명(姓名)을 지적하여 고(告)하지 않고 덮어놓고 길흉(吉凶)을 점친 것이다.
매선[埋扇] 부채를 땅 속에 묻는 것으로, 후기(候氣)의 한 가지 방법이다. 수서(隋書) 율력지(律歷志)에 “후제(後齊)의 신도방(信都芳)은 율관(律管)으로 후기하고 구름의 색채를 관찰했다. 일찍이 사람을 대해서 말하다가 하늘을 가리키며 이르기를 ‘맹춘(孟春)의 기(氣)가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사람이 가서 율관을 징험해보니 재가 날아서 이미 기에 응하고 있었다. 그는 달마다 기를 관측하였는데 모두 그의 말과 어긋남이 없었다. 또 윤선(輪扇) 24개를 만들어 땅 속에 묻고 24기를 관측했는데 한 기가 이를 때마다 한 부채가 저절로 움직이고 다른 부채는 멈추어 있었으며, 율관의 재와 서로 맞아 마치 부절(符節)을 맞추는 것 같았다.”고 하였다.
매선[梅仙] 매선(梅仙)은 북송 시대 처사 임포(林逋)를 가리킨다. 임포는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장가도 들지 않아 처자도 없었는데, 그는 특히 매화와 학을 대단히 사랑하여 매화를 심고 학을 길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까지 일컬었던 데서 온 말이다. 그의 매화시가 많지만, 그중에도 산원소매(山園小梅) 시의 “성긴 그림자는 맑고 얕은 물 위에 비껴 있고, 은은한 향기는 황혼 달빛 아래 부동하누나.[疎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라는 구절이 세상에 가장 회자되었다고 한다. <宋史 卷457 林逋列傳>
매선[梅仙] 매선(梅仙)은 한대(漢代)의 선인(仙人)인 매복(梅福)을 가리킨다. 그가 남창위(南昌尉)로 있을 때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찬탈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처자를 버리고 홀로 홍애산(洪崖山)에 들어가 득도(得道)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자(字)는 자진(子眞)이다. <漢書 卷六十七 梅福>
매선서신[梅仙書信] 매선(梅仙)은 매화를 말한다. 남조(南朝) 송(宋)의 육개(陸凱)가 강남의 매화 한 가지를 역사(驛使)를 통해서 장안(長安)에 있는 친구 범엽(范曄)에게 부치며 시를 지어 안부를 전한 고사가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太平御覽 卷970 荊州記>
매선성입이 첩회앙고풍[每蟬聲入耳 輒懷仰高風] 매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문득 고상한 풍모를 우러르고 그리워함. 주자(朱子)가 여백공(呂伯恭)에게 답한 편지에서 말하기를 “며칠 이래로 매미 소리가 더욱 맑으니, 이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일찍이 그대의 고상한 풍모를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33 答呂伯恭>
매성유[梅聖兪] 매성유(梅聖兪)는 바로 매요신(梅堯臣)으로, 선주(宣州) 선성(宣城) 사람이다. 젊은 시절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지 못하고 숙부의 공훈으로 태묘재랑(太廟齋郞)에 음보(蔭補)되고 동성현주부(桐城縣主簿)를 지냈다. 천성(天聖) 9년(1031)에 하남현주부(河南縣主簿)에 조용(調用)되어 낙양(洛陽)으로 와서 구양수(歐陽脩)를 알게 되었다. 다음 해 가을 매요신이 낙양을 떠나 하양현주부(河陽縣主簿)로 부임할 때 구양수가 송매성유귀하양서문(送梅聖兪歸河陽序文)을 지어 전송하였다. 새 울음소리를 따서 짓는 한시체(漢詩體)의 하나인 금언체(禽言體)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송(宋)나라의 소식(蘇軾)과 주희(朱熹) 등이 유사한 작품을 남기고, 한국에서는 장유(張維), 권필(權韠), 김윤식(金允植) 등이 이런 시를 지었다.
매성유[梅聖兪] 매요신(梅堯臣)으로, 성유(聖兪)는 그의 자이다. 송(宋)나라 안휘성(安徽省) 선성(宣城) 사람으로 호는 완릉(宛陵)이다. 지방의 관리로 전전하다가 구양수(歐陽脩)의 추천으로 중앙의 관리인 국자감 직강(國子監直講)이 되었다. 소순흠(蘇舜欽)·구양수 등과 같이 성당(盛唐)의 시를 본으로 하여 당시 유행하던 서곤체(西崑體)의 섬교(纖巧)한 폐풍을 일소하고, 새로운 송시(宋詩)의 개조(開祖)가 되었으며 두보(杜甫) 이후 최고의 시인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저서에 완릉집(宛陵集) 60권 등이 있다. 구양수의 매성유시집서(梅聖俞詩集序)에, 사람들이 다들 매성유(梅聖兪)의 시에 대해 감탄을 하면서도 아무도 매성유를 천거하는 이가 없음을 말하면서 “만약 그를 조정에 등용되게 하여 아송(雅頌)을 지어 대송(大宋)의 공덕(功德)을 노래하여 청묘(淸廟)에 올려서 상송(商頌), 주송(周頌), 노송(魯頌)의 작자를 뒤따르게 했더라면 어찌 대단하지 아니했으랴.”라 하였다. 시집으로 완릉집(宛陵集) 60권이 있고, 손자(孫子) 13편의 주(註)와 당재기(唐載記) 26권의 저작도 있었다.
매성유[梅聖兪] 송나라의 시인인 매요신(梅堯臣)으로, 성유는 그의 자이다. 매요신은 선성(宣城) 사람이며, 세상에서는 완릉선생(宛陵先生)이라고 칭한다. 일찍이 시로 이름을 날려 전유연(錢惟演), 구양수(歐陽脩) 등과 교제하면서 시문을 주고받았다. 30년이 지나도록 관각(館閣)의 관직을 얻지 못하다가 다 늙어서야 겨우 당서(唐書)를 수찬(修纂)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국자감 직강(國子監直講)을 지냈다. 저서로는 당재기(唐載記), 모시소전(毛詩小傳), 완릉집(宛陵集)이 있다. 그는 일찍이 하남 주부(河南主簿), 도관 원외랑(都官員外郞) 등 말직을 지냈을 뿐, 일생을 몹시 빈궁하게 살았다. 또한 송대의 문장가인 구양수(歐陽脩)는 바로 그의 시우(詩友)였던바, 구양수가 일찍이 매요신의 시집(詩集)에 쓴 서(序)에 “대체로 세상에 전해 오는 시들은 대부분 옛날 곤궁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다.……대개 곤궁할수록 시가 더욱 공교해지는 것이니, 그렇다면 시가 사람을 곤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곤궁한 사람이라야만 시가 공교해지는 것이로다.[蓋世所傳詩者 多出於古窮人之辭也……蓋兪窮則兪工 然則非詩之能窮人 殆窮者而後工也]”라고 하였다. <文忠集 卷42>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37 전국한당제자(戰國漢唐諸子)에 “매성유가 말하기를 ‘구양영숙이 자신은 한퇴지가 되려 하면서 도리어 나를 맹교에 비유하는구나!’라고 하였다.[梅聖兪說, 歐陽永叔, 它自要做韓退之, 却將我來比孟郊.]”라는 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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