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작[可作] 설치할 만하다.
가잔린저읍진민[歌殘隣杵泣秦民] 진(秦)나라 오고대부(五羖大夫) 백리해(百里奚)의 고사이다. 송(宋)나라 황정견(黃庭堅)의 한헌숙공만사(韓獻肅公挽詞)에 “바야흐로 큰 말의 술을 바쳐 장수를 기원하는 때에, 진나라 방아 소리가 멈출 줄 어찌 알았으랴.[方祈酌周斗 何意輟秦舂]”라는 말이 나온다. <山谷集 卷20> 시경(詩經) 대아(大雅) 행위(行葦)에도 “큰 말의 술을 바쳐, 장수를 기원한다.[酌以大斗 以祈黃耈]”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춘추 시대 진(秦)나라의 오고대부(五羖大夫) 백리해(百里奚)가 세상을 떠나자 “남녀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동자는 노래를 부르지 않고, 방아 찧는 사람들은 서로 절구질을 멈추었다.[男女流涕 童子不歌謠 舂者不相杵]”라는 말이 사기(史記) 권68 상군열전(商君列傳)에 나온다.
가잠[賈岑] 가의(賈誼)와 잠삼(岑參)을 가리킨다. 가의는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의 낙양(洛陽)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있어 문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잠삼은 당(唐)나라 남양(南陽) 사람으로 시에 재능이 있었다.
가잠가[椵岑歌] 해론(奚論)은 모량(牟梁) 사람이다. 그 아버지 찬덕(讚德)은 용감한 뜻과 아름다운 절개를 지녀 한 시대에 이름이 높았다. 건복(建福) 27년 경오년(610, 진평왕32)에 진평왕이 그를 선발하여 가잠성(椵岑城)의 현령으로 삼았다. 이듬해 신미년(611) 겨울 10월에 백제가 대군(大軍)을 출동시켜 와서 가잠성을 공격하여 100여 일이 지나니, 진평왕이 장수에게 명하여, 상주(上州), 하주(下州), 신주(新州)의 병력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는데, 전쟁의 형세가 불리해지자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찬덕이 분개하여 한탄하며 사졸들에게 말하기를 “세 고을 군대의 장수가 강한 적을 보고는 진격하지 않고 성이 위태한데도 구원하지 않으니, 이는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의롭지 못하게 사는 것은 정의롭게 죽느니만 못하다.” 하고는, 이에 격분하여 힘을 다해 싸웠다. 나아가 전투를 하기도 하고 들어와 지키기도 하며, 양식이 떨어지고 물이 떨어졌는데도 시체를 먹고 오줌을 마시면서까지 힘껏 싸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듬해 봄 1월이 되자 사람들은 지치고 성이 장차 함락되게 되어 형세상 다시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하늘을 우러러 크게 외치기를 “우리 왕이 나에게 성 하나를 맡겼는데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패하게 되었다. 원컨대, 죽어서 큰 원귀(冤鬼)가 되어 백제 사람들을 다 잡아먹고 이 성을 되찾겠다.” 하였다. 드디어 팔을 걷어붙이고 눈을 부릅뜨고 달려가서 나무에 부딪혀 죽었다. 이에 성이 함락되었다. 해론은 나이 20여 세 때에, 아버지가 국가에 공을 세워, 대나마(大奈麻)가 되었다. 건복 35년 무인년(618)에 왕이 명하여 해론을 금산(金山) 당주(幢主)로 삼아,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 변품(邊品)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 가잠성을 습격하여 그곳을 빼앗았다. 백제가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출동해 왔다. 해론 등이 그들을 맞아 전투가 벌어졌는데, 해론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예전에 나의 아버지가 이곳에서 별세했는데, 내가 지금 백제 군사와 이곳에서 싸우니,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하고는, 드디어 짧은 칼을 들고 적에게 달려가 몇 사람을 죽이고는 죽었다. 왕이 그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그 가족에게 매우 많은 상을 내려 돌보았다. 당시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가(長歌)를 지어서 애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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