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즉불곡[歌則不哭] 사마광(司馬光)의 상(喪)에 조문하는 일로 정자(程子)와 소식(蘇軾)이 벌인 논쟁에 관한 변론이다. 이날 조정에 경사가 있었는데, 관원들이 하례를 마치고 사마광의 상에 조문을 가고자 하였다. 이에 정자는 ‘공자는 이날 곡하면 노래하지 않았다.[子於是日哭則不歌]’라는 말로 불가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자 좌객들이 ‘공자는 곡한 날에 노래하지 않는다고 하였지, 노래한 날에 곡하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았다.[孔子言哭則不歌, 卽不言歌則不哭.]’라고 하면서 동의하지 않았으며, 소식은 ‘이것은 시장에서 횡사한 숙손통(叔孫通)이 만든 예이다.’라고 말하면서 비웃었다. <宋史全文 卷13上 宋哲宗一>
가증[加增] 더하여 늘임이다.
가지[加持] 가(加)는 가피(加被)의 뜻이요, 지(持)는 섭지(攝持)의 뜻이다. 부처님의 자비가 중생에게 베풀어지고, 중생의 신심이 부처님의 마음에 감명되어 서로 어울리는 것. 또는 부처님의 가피력을 입어 병·재난 등을 없애기 위하여 수행하는 기도법이다.
가지[呵止] 사람을 꾸짖고 못가게 함이다.
가지[加持] 불교의 진언종(眞言宗)에서 불력호념(佛力護念: 부처의 힘으로 염원을 보호함)을 비는 주법(呪法)이다.
가지[賈贄] 한(漢) 나라 육가(陸賈)와 당(唐) 나라 육지(陸贄)의 병칭이다.
가지[賈至] 당(唐) 나라 때의 시인으로 하남(河南) 낙양(洛陽) 사람이다. 자는(字) 유린(有隣) 또는 유기(幼幾)고, 가증(賈曾)의 아들이다. 현종(玄宗) 천보(天寶) 10년(751)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단보위(單父尉)가 되었다. 안록산(安祿山)의 난 때 현종(玄宗)을 따라 촉(蜀) 땅으로 달아나, 기거사인(起居舍人)과 지제고(知制誥)를 지냈다. 제위를 숙종(肅宗)에게 넘기자 전위책문(傳位冊文)을 지었고,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올랐다. 지덕(至德) 연간에 장군 왕사영(王士榮)이 어떤 일에 연좌되어 참수를 당하게 되자, 재주를 아낀 황제가 사면했는데, 그가 간언하여 처형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후에 다른 작은 법에 연루되어 악주사마(岳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악주사마로 쫓겨나 있던 3년 동안에 이백(李白)과 만났다. 보응(寶應) 원년(762)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궁으로 돌아왔고, 대력(大曆) 연간 초기에 신도현백(信都縣伯)에 봉해졌고 상서우승(尙書右丞)과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다.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임명되어 현역으로 죽어,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추증(追贈)되었다. 사후 시호를 문(文)이라 하였다. 시문에 능했고, 준일(俊逸)한 기품은 남조 때 송나라의 포조(鮑照)와 유신(庾信) 등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했다. 가지집(賈至集) 20권과 별집(別集) 15권이 있었으나 산실되었다.
가지비[家之肥]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부자가 돈독하고 형제가 화목하고 부부가 화합하는 것이야말로 모범적인 가정의 모습이다.[父子篤 兄弟睦 夫婦和 家之肥也]”라는 말이 나온다.
가지일견[家至日見] 효경(孝經) 광지덕장(廣至德章)에 “군자가 효를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집집마다 찾아다니고 날마다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君子之敎以孝也 非家至而日見之也]”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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