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호[蝎虎] 갈호는 도마뱀과에 속하는 파충류로 도마뱀보다 허리가 짧고 납작하다. 송 신종(宋神宗) 때 심한 가뭄이 들자 조정에서는 옛 법에 따라 동리마다 단지에 물을 가득 채우고 버드나무 가지를 그 단지에 꽂고 도롱뇽을 잡아다가 단지의 물 위에 띄워 놓고 어린아이들에게 주문을 외우게 하였다. 그러나 도롱뇽을 잡기 힘들어 간혹 갈호를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한다. <倦游雜錄>
갈호[羯胡] 고대 북방의 소수민족인데, 여기서는 안록산(安祿山)을 지칭한다. 안녹산은 본래 호인(胡人)으로, 당(唐) 현종(玄宗)의 총애와 신임을 얻어 동평군왕(東平郡王)에 봉해진 후, 하북(河北) 제도(諸道)의 절도사(節度使)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출신을 들어 ‘갈호(羯胡)’라 칭한 것이다.
갈홍[葛洪] 동진(東晉)의 도사. 강소(江蘇) 사람. 자는 치천(雉川), 호는 포박자(抱朴子), 소갈선옹(小葛仙翁)이라 불리기도 한다. 고학으로 유학(儒學)을 배웠으나 신선술(神仙術)에 통달한 재종조부(再從祖父) 갈현(葛玄)의 영향을 받고 갈현의 제자 정은(鄭隱)으로부터 연단(煙丹)의 비술(祕術)을 전승하였다. 동진의 시조(元帝)가 진(晉; 西晉)나라 승상으로 있을 때 무공을 세워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만년에 교지(交趾)에서 단사(丹砂)를 채광하여 선약(仙藥)을 만들었다고 한다. 평소부터 갈홍을 흠모하던 광주자사(廣州刺史) 등악(鄧嶽)이 “스승을 찾아 멀리 떠날까 하네.”라고 쓴 전갈을 받고 급히 달려가 보니 앉은 채로 죽은 갈홍의 얼굴색은 살아 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입관(入棺)할 때의 시체도 부드럽고 가벼웠다고 한다. 그래서 세인은 61세로 세상을 떠난 갈홍이 껍데기인 시체만 남겨 놓고 신선이 된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저서로는 신선의 도를 설(說)한 내편(內篇)과 정치·도덕을 논한 외편(外篇)의 포박자, 신선전(神仙專) 등이 있다.
갈홍[葛洪] 진(晉) 나라 구용(句容)의 사람. 현(玄)의 손자. 자는 치천(稚川). 호는 포박자(抱朴子). 세상에서 소갈선옹(小葛仙翁)이라 한다. 더욱 신선 도양(神仙導養)의 법을 좋아하고 연단(煉丹)의 술을 현의 제자 정은(鄭殷)에게 배웠다. 함화의 처음에 산기상시(散騎常侍) 겸 대저작(大著作)에 불리었으나,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교지(交趾)에서 단사가 난다는 말을 듣고 구하여 구루령(句漏令)이 되었다. 자질을 이끌고 광주를 지나 나부산(羅浮山)에 이르러 단(丹)을 연단하고, 이루어짐에 시해(尸解)했다. 저작에서 황백(黃白)의 일을 말한 것을 내편(內篇)으로, 기타 박잡통석(駁雜通釋)한 것을 외편(外篇)이라 한다. 그리고 그 호에 의하여 포박자(抱朴子)라 이름 했다. 따로 신선전, 주후방(肘後方) 및 비주시부(碑誅詩賦)·잡문(雜文) 등 수백 권의 책이 있다.
갈홍[葛洪] 진(晉)나라 사람으로 호는 포박자(抱朴子)라 한다. 그가 교지(交趾)에 단사(丹砂)가 난다는 말을 듣고 구루 영(句漏令)이 되기를 요청하자, 진제(晉帝)가 허락하지 않았다가, 관직 때문이 아니고 그 고을에 단사가 나기 때문이라는 그의 말을 듣고 허락해 주었다. 이에 갈홍이 자질(子姪)을 데리고 가다가 광주(廣州)에 이르니, 그곳 자사(刺史)가 가지 못하게 만류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나부산(羅浮山)으로 들어가서 단약(丹藥)을 만들어 먹고 신선이 되었다 한다. <晉書 卷72 葛洪列傳>
갈홍구령[葛洪求令] 진대(晉代) 사람. 호는 포박자(抱朴子). 도적을 평정한 공으로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으나 신선의 도양술(導養術)을 좋아하여 교지(交趾)에 단사(丹沙)가 난다는 말을 듣고, 그 영(令)이 되기를 자원하여 나부산(羅浮山)에 들어 연단(煉丹)하였다.
갈홍중니[葛洪仲尼] 진서(晉書) 갈홍전(葛洪傳)에서 “갈홍(葛洪)은 자(字)가 치천(稚川)이고 단양(丹陽) 구용(句容) 사람이다. 자호(自號)를 포박자(抱朴子)라 하였는데, 이를 책 이름으로 삼았다.”라 하였다. 이 책의 상박(尙博) 편에서 “세상에서 다들 오래된 옛날은 신비하고 귀하게 여기고, 동시대의 것은 업신여기고 천하게 여기니, 비록 세상에 유익한 책이라 할지라도 전대에서 전해진 글만 못하다고 한다. 그래서 중니(仲尼)는 당시에 존중받지 못했고, 태현경(太玄經)도 동시대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했다.”라고 하였다. 포박자(抱朴子) 오실(吳失) 편에서 “공자(孔子), 묵자(墨子)의 도(道)가 예전에는 시행된 적이 없었고, 맹가(孟軻)와 양웅(揚雄) 역시 곤경에 처하였으니, 덕이 있어도 때를 만나지 못함은 본래 그 유래가 있다.”라고 하였다.
갈홍천[葛洪川] 다시 서로 만나기를 약속한 말. 당(唐) 나라 때 이원(李源)이 친구인 고승(高僧) 원택(圓澤)과 함께 삼협(三峽)에 이르렀을 때, 원택이 후세에 갈홍천(葛洪川) 가에서 다시 서로 만나자고 약속을 하였는데, 그로부터 12년 뒤에 그가 과연 약속대로 재생(再生)하여 갈홍천 가에 있는 천축사(天竺寺)의 삼생석(三生石)에서 다시 서로 만나게 되었던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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