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찰[監察] 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의 약칭이다. 백관(百官)을 규찰하고 기타 농상형옥(農桑刑獄) 등을 감찰하였다. <唐書 百官志>
감찰[監察] 조선조 때 사헌부 정6품 벼슬이다.
감찰어사[監察御史] 백관(百官)을 규찰(糾察)하고, 지방을 순회하며 형옥(刑獄)과 곡창(穀倉) 등을 살피는 일을 맡은 관명(官名)이다.
감창[感愴] 감모(感慕)하는 마음이 움직여 슬픔. 감격스럽고 슬픔을 이른다.
감채[蚶菜] 붉은 조개의 일종이다. 당(唐) 나라 때에 남해 지방에서 감채를 진상하여 백성들의 폐해가 심하였는데, 공규(孔戣)가 글을 올려 이것을 말해서 감채를 진상하지 않도록 하였다.
감척[感慼] 느낌, 생각.
감천[甘泉] 산명(山名).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순화현(淳化縣), 속칭 마석령(磨石嶺).
감천[甘泉] 감천은 섬서성(陝西省) 감천산(甘泉山)에 있는 궁전의 이름이다. 본래 진(秦)나라의 궁전이었는데, 한 무제(漢武帝)가 증축해 놓고 이곳에서 제왕(諸王)들의 조회를 받고 외국의 빈객을 접대하였다. 사기(史記) 권110 흉노열전(匈奴列傳)에 “오랑캐의 기마병이 대구주(代句注)의 변새에 침입하자 봉화가 감천과 장안에 통보하였다.[胡騎入代句注邊 烽火通於甘泉長安]”라고 하였다.
감천궁[甘泉宮] 감천궁은 섬서성(陝西省) 감천산(甘泉山)에 있는 한나라 때의 궁전으로, 한 무제(漢武帝)가 제후 왕들의 조회를 받고 외국의 사신들에게 잔치를 열어 주던 곳이다. 한 무제 때에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이 흉노를 정벌하고 금인(金人) 즉 불상을 노획해 오자, 이를 감천궁에 안치하고 분향하며 섬겼다. <魏書 卷114 釋老志>
감천궁[甘泉宮] 섬서성(陝西省) 순화현(淳化縣)의 감천산(甘泉山)에 있는 궁전으로, 본디는 진(秦)나라의 궁궐이었는데, 뒤에 한 무제(漢武帝)가 방사(方士)인 공손경(公孫卿)의 말에 따라 이곳에 비렴관(蜚廉觀), 계관(桂觀), 통천대(通天臺) 등을 증축하고는 피서지로 사용한 이궁(離宮)이다. 구익첩여(鉤弋婕妤)가 무제를 따라 감천궁에 갔다가 잘못을 저질러 견책을 당하자 근심하다가 죽었다. <漢書 卷97 外戚傳>
감천부[甘泉賦] 한 무제(漢武帝) 때 양웅(揚雄)이 지은 문장 제목으로, 궁궐의 아름다움에 대해 묘사하였다. 양웅이 일찍이 천자의 부름을 받고 대궐에 들어갔다가 뒤에 천자를 따라 감천궁(甘泉宮)을 다녀와서 감천부를 지어 올리자, 천자가 그것을 보고는 아주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감천부[甘泉賦]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 직숙랑(直宿郞) 양장(楊莊)이 양웅의 글이 사마상여와 같다 하여 그를 천거하였는데, 영시(永始) 4년 정월에 양웅이 성제를 따라 감천에 갔다가 제도(制度)가 장려(壯麗)한 것을 보고 이 부를 지어 풍자하였다 한다. <文體明辨 卷3 賦一上>
감천송[甘泉頌] 감천송은 한 나라 때 양웅(揚雄)이 지은 감천부(甘泉賦)를 가리킨다.
감천전[甘泉殿] 궁전 이름. 협서성(峽西省) 감천산(甘泉山) 위에다 진시황(秦始皇)이 처음세운 것인데, 뒤에 한 무제(漢武帝)가 증축하였다. <漢書 揚雄傳>
감천화[甘泉火] 감천은 한 나라 때 상군(上郡) 조음현(雕陰縣)의 산 이름으로 북쪽의 흉노(匈奴)와 접경지대인데, 오늘날의 섬서성(陝西省) 부주(鄜州)이다. 한 문제(漢文帝) 때 흉노가 북쪽 변경을 침입하므로 감천산에 척후병을 두고 봉화시설을 설치하여 그들을 경계하였다고 한다. 양(梁) 나라 서비(徐悱)의 고의수도장사개등낭야성시(古意詶到長史漑登琅耶城詩)에 “척후와 봉화로서 감천 경계하고 상곡군 설치하여 누란국 막았다.[甘泉驚烽候 上谷拒樓蘭]”라 하였다. <文選 卷二十二 遊覽>
감체[欿傺] 걱정하여 물끄러미 있다. 서운하여 물끄러미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