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강관[江關]~강관[絳灌]~강관[講官]~강관무문[絳灌無文]


강관[江關]  강남(江南)과 같다. 남북조(南北朝) 후주(後周)의 유신(庾信)이 높은 관직에 있었으나 늘 향수(鄕愁)에 젖어 있다가 애강남부(哀江南賦)를 지었다. 두보(杜甫)의 영회고적(詠懷古跡) 시 첫째 수(首)에 “유신은 평생 몹시 쓸쓸하더니, 만년에 시부가 강관을 진동하였지.[庾信平生最蕭瑟 晩年詩賦動江關]”라고 하였다.

강관[江關]  관(關) 이름이다. 큰 강물이 두 산 사이를 흐르며 형세가 극히 험준하여 사람이 접근하기 어렵다고 한다. <後漢書 岑彭傳>

강관[江關]  동강(東江)을 가리킨다.

강관[羌管]  피리를 가리킨다.

강관[絳灌]  강관(絳灌)은 한 나라의 개국공신인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의 합칭이다. 사기(史記) 권9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회음후 한신(韓信)은 강후나 관영과 같은 반열에 서게 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언젠가 한신이 장군 번쾌의 집에 들르자, 번쾌가 무릎 꿇고 절하면서 영송하였으며, 말끝마다 신하라고 칭하면서 ‘대왕께서 신의 집에 영광스럽게 왕림해 주시다니요.’라고 하였다. 한신이 문을 나서며 쓴웃음을 지으면서 ‘내가 살아서 그만 번쾌 따위와 한 줄에 서게 되다니.’라고 하였다.[羞與絳灌等列 信嘗過樊將軍噲 噲跪拜送迎 言稱臣 曰大王乃肯臨臣 信出門笑曰 生乃與噲等爲伍]”라는 말이 나온다.

강관[絳灌]  한 고조(漢高祖)의 신하인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의후(懿侯) 관영(灌嬰)을 가리킨다. 가의(賈誼)는 불과 스무 살의 어린 나이로 문제(文帝)의 깊은 신임을 얻어 태중대부(太中大夫)로 발탁되어 복색(服色), 제도(制度), 관명(官名) 등의 대대적인 개혁을 주장하다가 당시 대신이었던 주발·관영 등의 참소를 입었다. 그리하여 문제의 신임을 잃고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어 서른셋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漢書 卷48 賈誼傳>

강관[絳灌]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신하인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관영(灌嬰)의 병칭이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여씨(呂氏) 일족을 몰아내고 문제(文帝)를 옹립하여 한(漢)나라 황실을 튼튼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가의(賈誼)의 급진적인 개혁을 반대하였다. <史記 絳侯周勃世家><史記 灌嬰列傳>

강관[絳灌]  한나라의 개국 공신인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을 가리킨다. 가의가 20세에 발탁된 후 빠르게 승진하여 태중대부에까지 오르고 여러 가지 제도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하려 할 때 가의를 비판하고 시기하여 조정에서 쫓아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강관[講官]  황제(皇帝)의 경연(經筵)에 진강(進講)을 담당하거나 태자궁(太子宮)에서 시강(侍講)하는 관원(官員)을 칭한다.

강관무문[絳灌無文]  주발과 관영의 문장. 한(漢)나라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은 모두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였는데 공을 세워 제후에 봉해졌다. 두 사람은 포의(布衣)로 입신하여 촌스럽고 질박하며 학문이 부족하였다. 진서(晉書) 권101 유원해재기(劉元海載記)에 “한(漢)나라 수하(隨何)와 육가(陸賈)에게는 무용(武勇)이 없고, 강후 주발과 관영에게는 문학(文學)이 없다.[隨陸無武 絳灌無文]”라고 하였다.

Leave a Reply

Copyright (c) 2015 by 하늘구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