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락[康樂] 강락은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대문장가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다. 사영운은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나 강좌(江左)에서 비견될 자가 없었으나, 성격이 편협하여 사람들과 잘 부딪쳤다. 조정에서 자신을 문장으로만 대우해 주고 실권을 주지 않는 데 불만을 품어 벼슬을 버리고 회계(會稽)로 물러나 살면서 몹시 화려한 장원(莊園)을 만들고는 마음껏 즐겼다. 그러나 뜻은 항상 조정에 있어서 정사에 관여하다가 마침내는 기시(棄市)되고 말았다. <宋書 卷67 謝靈運列傳>
강락[康樂] 남조(南朝) 송(宋)나라 시인 사영운(謝靈運)으로, 강락공(康樂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한 말이다. 서화(書畫)와 시문(詩文)에 능했으며 등산을 좋아했다.
강락개도[康樂開道] 강락은 남조 시대(南朝時代) 송(宋) 나라의 서화가(書畫家)이자 문장가인 사영운(謝靈運)의 봉호(封號)이다. 그는 산수를 좋아하였는데, 한번은 수백 명을 동원하여 시령(始寧)의 남산(南山)에서부터 임해(臨海)까지 나무를 베어내고 곧바로 길을 내니, 임해 태수 왕수(王琇)가 크게 놀라 산적(山賊)이라 하였다. <宋書 謝靈運傳>
강락과혜련[康樂誇惠連] 강락(康樂)은 남조(南朝) 송(宋)의 문인 사령운(謝靈運)의 봉호(封號)이고, 혜련(惠連)은 사령운의 족제(族弟)인 사혜련(謝惠連)을 가리킨다. 사령운이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다가 꿈에 사혜련을 만나 보고 ‘지당생춘초(池塘生春草)’라는 명구를 얻은 뒤에 “이 시구는 신령이 도와준 덕분에 나온 것이지 나의 말이 아니다.[此語有神功 非吾語也]”라고 술회한 고사를 두고 한 말이다. <南史 卷19 謝惠連列傳>
강랑금일척[江郞錦一尺] 남조(南朝) 때의 문장가 강엄(江淹)이 만년(晩年)에 꿈속에서 장경양(張景陽)이라는 사람에게 비단폭을 돌려준 뒤로부터 문장이 갑자기 퇴보하기 시작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南史 卷59 江淹列傳>
강랑재고진[江郞才告盡] 강랑은 양(梁) 나라 때 문장가 강엄(江淹)을 가리키는데, 그가 본디 문장으로 크게 이름을 드날렸으나, 꿈에 오색(五色)의 붓을 곽박(郭璞)에게 돌려주고 나서 문재(文才)를 상실했다고 한다.
강랑재진[江郞才盡] 강랑은 중국 남조(南朝) 때의 강엄(江淹)을 가리킨다. 그가 어릴 때 꿈속에서 자칭 곽박(郭璞)이란 사람으로부터 오색 붓을 받고는 문장이 크게 진보하였는데, 만년에 야정(冶亭)이란 정자에서 자다가 곽박이 다시 붓을 회수해 가는 꿈을 꾼 뒤로는 좋은 시구(詩句)가 전혀 나오지 않았고, 이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고 “재주가 다하였다.[江郞才盡]”라고 하였다. <南史 卷59 江淹列傳> 학문상에 있어 한 차례 두각을 나타낸 후 퇴보하는 것을 뜻한다.
강랑채필[江郞彩筆] 강랑은 남조(南朝) 양(梁) 나라 때 문장가 강엄(江淹)을 말한다. 채필은 채색 붓으로, 뛰어난 시문을 뜻한다.
강랑한부[江郞恨賦] 강랑은 남조(南朝) 고성(考城) 사람 강엄(江淹)인데 자는 문통(文通)이고 벼슬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이르렀으며, 예릉후(醴陵侯)에 봉해졌다. 소시적부터 문예(文譽)가 있었으며 유명한 한부(恨賦)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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