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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가[剛柔歌]~강유사[江有汜]~강유화계[江逌火鷄]


강유[剛柔]  강강(剛强)한 것과 유순한 것으로, 주역(周易)에서 음양(陰陽)을 서로 대응시킨 개념이다. 강유가 음양과 서로 대응될 때는 양(陽)은 강(剛), 음(陰)은 유(柔)가 된다. 주역(周易)에서 입천(立天)의 도(道)를 음과 양, 입지(立地)의 도를 강과 유, 입인(立人)의 도를 인(仁)과 의(義)로 대응시켜 설명한다. 그러므로 천지인(天地人) 세 가지[三才]를 바탕으로 해서 볼 때 천도(天道)는 음양, 지도(地道)는 강유, 인도(人道)는 인의(仁義)가 되는 바, 각각이 가진 본질적인 바탕을 일컫는 말이다.

강유[姜維]  강유(姜維)는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대장군으로, 제갈량(諸葛亮)의 뒤를 이어 아홉 차례나 중원(中原)을 공략하였는데, 나중에 그가 위(魏)나라에 잡혀 죽을 적에 배를 갈라 보니 쓸개가 말[斗]만큼 컸다는 기록이 전한다. <三國志 卷44 蜀書 姜維傳 註>

강유[綱維]  삼강(三綱)과 사유(四維). 삼강은 군신·부자·부부, 사유는 예(禮)·의(義)·염(廉)·치(耻)이다.

강유[姜維]  삼국시대 촉(蜀)의 무장. 천수기(天水冀; 甘肅) 사람. 자(字)는 백약(伯約)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다. 건흥(建興) 6년 제갈량(諸葛亮)이 북벌군을 일으킬 때 투항하여 크게 신임을 받았다. 제갈량이 죽은 후 촉(蜀)의 군사상 책임자가 되고, 결국 대장군, 다시 녹상서사(錄尙書事)로서 민정에도 관여했다. 그러나 환관의 횡포에 맞섰기 때문에, 수도인 성도(成都)에 들어가지 못했다. 촉(蜀)이 멸망하자 위(魏)에 항복하여 종회(鍾會)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종회가 난을 일으켜 살해되었다.

강유[剛柔]  음양(陰陽), 주야(晝夜), 또는 군자, 소인 등의 뜻으로 쓰인다.

강유[江逌]  진(晉)나라 진유(陳留) 사람으로 자는 도재(道載)이다. 벼슬은 태상(太常)에 이르고 저서에는 원적서찬(院籍序賛)·일사잠(逸士箴) 등이 있다. <晉書 卷83 江逌列傳>

강유[絳帷]  후한(後漢)의 명유(名儒) 마융(馬融)이 늘 높은 마루에 앉아 붉은 사장막을 내리고[絳紗帳] 생도들을 교수했는데, 뒤에 여악(女樂)들이 늘어섰었음을 말한다.

강유가[剛柔歌]  강유는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여섯 번째인 삼덕(三德)에서 온 말로, 홍범에 이르기를 “여섯 번째 세 가지 덕은, 첫째는 정직함이요, 둘째는 강함으로 이기는 것이요, 셋째는 유순함으로 이기는 것이니, 평강은 정직한 것이요, 강하여 불순한 자는 강함으로 이기고, 유순한 자는 유순함으로 이기고, 침잠한 이는 강함으로 이기고, 고명한 이는 유순함으로 이긴다.[六三德 一曰正直 二曰剛克 三曰柔克 平康正直 彊弗友剛克 燮友柔克 沈潛剛克 高明柔克]”라고 하였다.

강유겸전[剛柔兼全]  강함과 부드러움을 아울러 갖추어 있다는 뜻으로 성품이 부드러우면서도 강하다는 말이다.

강유사[江有汜]  시경(詩經) 소남(召南) 강유사(江有汜)에 “강에는 나눠진 물줄기가 있다.[江有汜]” 하였다. 벗과 헤어짐을 비유한다.

강유사[江有汜]  전체 3장 15구로 되어 있는 이 시는 잉첩(媵妾)이 자신을 두고 간 적처(嫡妻)에 대하여 읊은 것인데, 적처가 지금은 자신을 두고 갔지만 훗날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詩經 召南 江有汜>

강유우망[畺有寓望]  국경에 외국 손님을 맞이하고 전송하는 집을 설치하고 후망(候望)하는 사람을 두는 일이다.

강유화계[江逌火鷄]  강유(江逌)는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동진(東晉)의 장수이다. 동진(東晉)의 중군장군(中軍將軍) 은호(殷浩)가 장차 전진(前秦)을 정벌하려고 하였는데, 강족(羌族)과 정령(丁零)이 배반하자 은호(殷浩)의 전군(全軍)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강족(羌族)의 수장(首長) 요양(姚襄)이 은호(殷浩)의 진영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진영을 설치하여 은호(殷浩)를 압박하자, 강유(江逌)로 하여금 이를 공격하게 하였다. 강유(江逌)는 진군(進軍)하여 요양(姚襄)의 진영에 이르러 장교들에게 “지금 우리 군이 정예병이나, 병력이 강족(羌族)보다 적고 저들의 참호와 성채가 견고하여 힘으로 다투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계략을 써야 한다.”라고 하고, 수백 마리의 닭을 긴 줄로 연결하여 닭발에 불을 붙여 요양(姚襄)의 진영으로 흩어 보냈다. 요양(姚襄)의 진영에 불이 붙어 혼란에 빠지자, 곧바로 공격하여 요양(姚襄) 군(軍)을 대파하였다. <晉書 권83 江逌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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