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획[講畫] 과거나 취재(取才) 때 강서(講書) 시험에서 얻은 성적의 점수를 말한다.
강획[講劃] 과거(科擧)와 취재(取材) 때 강(講)의 성적을 획으로 표시하는 것으로서, 곧 강서 성적(講書成績)의 점수를 말한다.
강후[康侯] 강후는 나라를 잘 다스리는 제후(諸侯)라는 뜻인데, 주역(周易) 진괘(晉卦) 괘사(卦辭)에 “진은 강후에게 말을 많이 하사하고 낮에 세 번씩 접견하는 상이로다.[晉 康侯用錫馬蕃庶 晝日三接]”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이는 곧 대신(大臣)이 임금으로부터 각별한 은총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강후[絳侯] 강후는 중국 한나라 고조(高祖) 때의 공신인 주발(周勃)의 봉호이다. 한나라 문제(文帝) 때 강후 주발이 승상에서 물러나 강현(絳縣)에 취임해 있다가 “주발이 모반하려 한다.”라는 어떤 자의 고변으로 인하여 무고하게 장안으로 체포되어 가서 조사를 받던 중, 어떻게 소명을 해야 할지 몰라서 옥리(獄吏)에게 천금을 주고 방도를 강구한 결과, 옥리가 문서의 뒷면에다 “공주로 증거를 대라.[以公主爲證.]”라는 말을 써서 보여주므로, 그의 말대로 공주를 증거로 삼아서 가까스로 용서를 받고 풀려나게 되었다. 공주는 바로 문제의 딸로 주발의 자부가 되었으므로, 그녀를 증거로 삼게 했던 것이다. <史記 卷57 絳侯周勃世家>
강후[絳侯] 주발(周勃)의 봉호(封號)이다. 주발은 한 고조(漢高祖)의 개국 공신이다. 여녹(呂祿) 등 여씨(呂氏)들이 모반하였을 때 주발이 이들을 베어 한실(漢室)을 편안히 하였고, 문제(文帝) 때 우승상(右丞相)이 되었다. 뒤에 모반(謀反)한다는 무고(誣告)를 입었다가 지혜로운 옥리의 도움을 얻어 풀려날 수 있었다. 강후가 옥에서 풀려나며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백만 군대를 거느렸으나, 어찌 옥리가 귀한 줄을 알았겠는가?” 하였다. <史記 卷57 絳侯周勃世家>
강후[絳侯] 한(漢) 나라 주발(周勃)인데 유방(劉邦)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그 공로로 강후에 봉해졌다. 유방이 일찍이 말하기를 “주발은 중후하고 학문은 없으나 유씨(劉氏)를 안정시킬 사람은 주발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여후(呂后) 때에 여씨(呂氏)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는데, 여후가 죽자 주발이 진평(陳平) 등과 같이 여씨들을 죽이고 문제(文帝)를 맞이하여 왕으로 모시었다. <漢書 卷 40 周勃傳>
강후[姜后] 주 선왕(周宣王)의 부인인 강후는 어질고 덕성이 있었는데, 어느 날 선왕이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자 강후가 비녀를 벗어 머리를 풀고 대죄하면서 “첩이 재능이 없어 첩의 음심(淫心)이 드러났습니다. 심지어 군왕으로 하여금 예법을 잃고 늦잠을 자게 하여, 여색에 빠져 덕을 잊었다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였습니다.……첩을 처벌해 주십시오.”라고 하니, 선왕이 즉시 반성하고 정사에 부지런히 힘썼다고 한다. <列女傳 周宣姜后>
강후[姜后] 주선왕이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 후부인(后夫人)을 방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하루는 강후가 밖에 나갔다 들어오더니, 비녀와 귀걸이를 벗고 선왕에게 대죄하면서 말하기를 “첩이 재주가 없어 군주로 하여금 예를 잃게 하고 늦게 일어나게 만들었으니 죄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列女傳 賢明 周宣姜后傳>
강희[康熙] 청(淸) 나라 성조(聖祖)의 연호로 1662년부터 1722년까지 사용되었다.
강희자전[康熙字典] 청(淸) 성조(聖祖) 때 장옥서(張玉書), 진정경(陳廷敬) 등이 칙명에 따라 편찬한 자서(字書)이다. 설문(說文)·옥편(玉篇)을 기본으로 하여 매자에 성음(聲音)과 훈고(訓詁)를 상술한 것이다 총자수는 4만 9천 30자. 42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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