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험능지[見險能止] 험한 것을 보고 능히 그침. 진(晉) 나라 사안(謝安)이 바다를 건너갈 때 풍랑이 심해지자 사람들이 돌아가자고 아우성을 쳤는데, 태연자약하게 노래를 읊는 사안의 모습을 보고 뱃사공이 계속 배를 저어 갔다는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雅量>
견현사제[見賢思齊]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어진 이의 선행을 보거든 그와 같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이의 불선한 행동을 보거든 마음속으로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라고 하였다. <論語 里仁>
견현사제[見賢思齊] 논어(論語) 이인(里人)의 “어진 이를 보거든 그와 나란히 할 방도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이를 보거는 안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라.[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고 하였다.
견호미견호[見虎未見虎] 호랑이를 보기는 보았으되 직접 실제로 보지 못 했음이니 무엇이나 실제로 당해 보지 않으면 생각이 간절하지 못함을 이른다. 견우미견양(見牛未見羊).
견화[見和] ‘화(和)’는 관(棺)의 머리로 돌출한 부분을 이른다. 여씨춘추(呂氏春秋) 개춘(開春)에 “옛날 주(周)나라의 왕 계력(季歷)을 초산의 끝에 장사지냈는데, 난수(欒水)가 그 묘를 침식하여 관의 앞부분이 보였다.[昔王季歷葬于楚山之尾 欒水齧其基 見棺之前和]”라고 보인다. 계력은 주나라 문왕(文王)의 아버지인데, 뒤에 왕계(王季)로 추존되었다.
견회[畎澮] 전지(田地) 사이의 농수로(農水路)이다.
견회[遣懷] 시름을 떨치다. 회포를 풀다. 견회(遣懷)는 견흥(遣興)과 같은 말로, 회포를 토로하여 답답한 마음을 달래 보낸다는 뜻이다. 참고로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 가석(可惜)에 “마음을 너그럽게 하는 것은 응당 술이요, 흥을 달래 보내는 것은 시보다 나은 것이 없다오.[寬心應是酒, 遣興莫過詩.]”라고 하였다.
견회구혁[畎澮溝洫] 전간(田間) 수로의 명칭이니, 견은 너비와 깊이가 각각 1척이고, 회는 너비와 깊이가 각각 2심(尋)이고, 구는 너비와 깊이가 각각 4척이고, 혁은 너비와 깊이가 각각 8척이다. <周禮 冬官考工記 匠人>
견후[甄后] 삼국(三國) 시대 위 문제(魏文帝)의 부인으로, 뒤에 후(后)가 되었다. 명제(明帝)와 동향공주(東鄕公主)를 낳았다. 뒤에 곽후(郭后)에게 총애를 빼앗기고 원망하다가 사사되었다.
견훤[甄萱] 견훤은 후백제(後百濟)의 시조로, 일찍이 신라(新羅) 비장(裨將)이었던 그는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거병하여 처음 무진주(武珍州)를 점령했다가 뒤에 다시 전주(全州)에 입성하여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왕(後百濟王)이라 자칭하였다. 그 뒤에 그는 궁예(弓裔)의 후고구려(後高句麗)와 자주 싸워서 세력을 넓혔고, 왕건(王建)의 고려(高麗)와도 수시로 전쟁을 벌여 세력을 더욱 확장했으나, 뒤에 고창(古昌)에서 왕건에게 한 번 패전한 후부터 세력이 점점 기울어진 데다 왕위 계승 문제로 세 아들 신검(神劒), 양검(良劍), 용검(龍劍)과 불화가 깊었던 탓으로 끝내 신검에 의하여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었다. 그러다 왕건에게 투항해서 상부(尙父)의 칭호와 함께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으나, 그 후 얼마 안 되어 황산사(黃山寺)에서 등창으로 죽었다고 한다.
견훤성[甄萱城] 신라 말기에 후백제의 시조 견훤(甄萱)이 처음 전주(全州)에 입성(入城)하여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라 자칭했던 데서, 즉 전주를 가리킨다.
견흥[遣興] 흥을 돋우다. 흥겨워하다. 글을 짓거나 여흥을 하며 흥을 돋우어 마음을 달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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