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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간상[瓊簡相]~경감가복[耿弇賈復]~경감다벌수목[耿弇多伐樹木]


경간[卿懇]  ‘경의 간청’이라는 뜻으로, 품계가 높은 신하의 상소에 대해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릴 때 쓰는 말이다. 대신(大臣), 상보국(上輔國), 산림(山林) 등이 올린 상소에 이 말을 쓰고, 그 이하의 신하가 올린 상소에는 ‘너의 간청’이라는 뜻의 ‘이간(爾懇)’이라는 말을 쓴다.

경간[京奸]  중앙 아문(衙門)에 있으면서 농간을 부리는 간리(奸吏)이다.

경간상[瓊簡相]  신선의 자질을 타고 났다는 뜻이다. 양(梁)나라 때 도굉경(陶宏景)이 지은 도가서(道家書) 진고(眞誥)에서 신선의 관상에 대해 말하기를 “신선 가운데 이름이 경간(瓊簡)에 있는 자는 눈에 푸른 핏줄이 있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경간은 선적(仙籍) 중의 한 등급이다.

경감[耿弇]  경감은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 때 사람이다. 경감이 장보(張步)와 싸우고 있을 때 광무제가 경감이 있는 곳으로 구원하러 온다고 하였다. 이때 경감의 군사가 적보다 약하였으므로 진준(陳俊)이 경감에게 이르기를 “적병들의 기세가 몹시 왕성하니 군사들을 쉬게 하고서 황제께서 구원하러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자 경감은 “황제께서 오신다고 하니 신하로서는 소를 잡고 술을 걸러서 백관들을 맞이하여야 마땅하다. 그런데 도리어 적들을 황제에게 남겨 주려고 한단 말인가?” 하고는, 출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後漢書 卷19 耿弇列傳>

경감[驚感]  놀라고 감탄함.

경감[耿弇]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중흥 사업을 도와 동마(銅馬)·적미(赤眉) 등의 제적(諸賊)을 격파한 명장으로, 광무가 조(趙) 나라 수도 한단(邯鄲)의 궁궐에서 쉬고 있을 때, 경시(更始)의 실정(失政)을 논박하며 제위(帝位)에 오를 것을 건의하였다. <後漢書 卷49>

경감가복[耿弇賈復]  모두 동한(東漢) 초기의 명신이다.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시 술고(述古)에 “경감과 가복도 종신으로서, 다 같이 우익이 되어 배회하였지.[耿賈亦宗臣 羽翼共徘徊]”라고 하였다.

경감다벌수목[耿弇多伐樹木]  경감(耿弇)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명장(名將)이다. 광무제(光武帝)가 경감(耿弇)에게 제남(濟南)의 장보(張步)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장보(張步)는 대장군(大將軍) 비읍(費邑)으로 하여금 역하(歷下)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다시 병력을 나누어 일부를 축아(祝阿)에 주둔시켰으며, 별도로 태산(太山)의 종성(鍾城)에도 수십 개의 진영(陣營)을 설치하여 경감(耿弇)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황하(黃河)를 건너간 경감(耿弇)은 먼저 축아(祝阿)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일부러 포위망 한쪽을 열어놓아 적으로 하여금 종성(鍾城)으로 도망하게 하였다. 종성(鍾城) 사람들은 축아(祝阿)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마침내 성(城)을 비우고 도망하였다. 비읍(費邑)은 아우 비감(費敢)을 보내어 거리(巨里)를 지키게 하였다. 경감(耿弇)은 진군하여 멀리 거리(巨里)를 위협하면서, 장병들에게 “거리성(巨里城)을 공격하기 위해 수목(樹木)을 많이 베고 골짝의 구덩이를 메운다.”고 소문을 내게 하였다. 비읍(費邑)은 이 소문을 듣고 거리성(巨里城)을 구원하고자 하였다. 경감(耿弇)이 공성기구(攻城器具)를 수리하게 하고 “3일 후에 거리성(巨里城)을 총공격한다.”는 명령을 선포하면서 포로를 은밀히 놓아주니, 포로가 돌아가 이 사실을 비읍(費邑)에게 알렸다. 비읍(費邑)은 서둘러 정예병력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거리성(巨里城)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다. 이에 경감(耿弇)은 3천 명의 병력을 나누어 거리성(巨里城)을 포위하고, 자신은 정예병을 이끌고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 비읍(費邑)의 군대와 맞아 싸워서 대파하여 비읍(費邑)을 참수하고 제남(濟南)의 40여 진영을 평정하였다. <後漢書 卷19 耿弇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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