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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졸수졸[更卒戍卒]~경종경병[景宗競病]~경종신릉분[耕種信陵墳]


경졸수졸[更卒戍卒]  진(秦)나라 때에 백성들이 매년 1개월씩 군무(軍務)에 복역하는 것을 ‘경졸(更卒)’이라 하였으며, 또 일생 동안 자신의 호적이 등록된 군(郡)에서 1년간 병역(兵役)에 복무하고 수도나 변경에서 또 1년간 복무하였는데, 이것을 ‘수졸(戍卒)’이라 하였다.

경종[景鐘]  춘추(春秋) 시대 진(晉)나라 경공(景公)이 주조(鑄造)한 종(鐘)을 말하는데, 진(晉) 나라 위과(魏顆)가 일찍이 자기 나라에 쳐들어온 진(秦) 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쳐서 그의 공훈(功勳)이 이 경종에 새겨졌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공훈을 포창(褒彰)하는 뜻으로 쓰인다. 국어(國語) 진어(晉語)7에 “옛날 진(晉)나라가 노(潞)와 싸워 승리하였는데 진(秦)나라가 그 공로를 탈취하려고 하였다. 위과(魏顆)가 몸소 보지(輔氏)에서 진(秦)나라 군대를 퇴각시키니 경공이 친히 두회(杜回)에 머물며 그의 공로를 경종에다 새기라고 명하였다.”라고 하였다.

경종[景鐘]  춘추시대 진 경공(晉景公)이 주조한 진(晉) 나라의 종(鐘)이다. 진(晉)나라 대부 위과(魏顆)가 진(秦)나라 장수 두회(杜回)를 사로잡은 전공을 그 종에 새겼으므로, 후세에 영원히 기념할 만한 대공(大功)의 뜻으로 쓰인다. 국어(國語) 진어(晋語)에 “위과(魏顆)가 진(秦) 나라 군사를 물리쳤으므로 그 공훈을 경종에 새기라[魏顆以其身郤退秦師 其勳銘於景鍾]”고 하였다. 또 그 해(解)에 “경종은 경공(景公)의 종”이라 하였다.

경종경병[景宗競病]  남조(南朝) 양(梁)나라 조경종(曹景宗)이 위(魏)나라를 격파하고 돌아오자, 양 무제(梁武帝)가 화광전(華光殿)에서 연회를 열어 술을 마시며 시를 번갈아 짓기 위해 심약(沈約)으로 하여금 운자를 정하도록 하였다. 차례가 경종에 이르자 다른 운자는 이미 다 사용하였고, 험운(險韻)인 경(競), 병(病) 두 글자만 남아 있었다. 경종이 붓을 들고 곧바로 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 “떠날 적엔 아녀자들이 슬퍼하더니 돌아올 때엔 피리 북 다투어 불어 대네.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노라 곽거병과 비교하면 그 누가 더 나은가.[去時兒女悲 歸來笳鼓競 借問行路人 何如霍去病]”라고 하였는데, 양 무제와 여러 신하들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경종신릉분[耕種信陵墳]  신릉군(信陵君)의 무덤에서 농사를 짓는다. 세상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신릉군은 위 소왕(魏昭王)의 아들이다. 중국 전국시대 위(魏) 나라의 정치가로 이른바 ‘전국사군(戰國四君)’ 가운데 하나이다. 안리왕(安釐王) 재위기에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며 주변 나라들과 연합하여 진(秦)을 공격하여 세력 확장을 막았다. 항상 식객(食客)이 3천 인이나 되었고 위엄과 명망이 천하에 떨쳤었다. <史記 卷七十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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