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경진[京塵]~경진묘성[景辰廟成]~경진이퇴[輕進易退]


경진[庚辰]  경진은 우 임금을 도와 홍수(洪水)를 다스린 귀신 이름이다. 고악도경(古岳瀆經)에 “우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적에 동백산(桐柏山)에서 회와(淮渦)의 물귀신 무지기(無支祈)를 얻었는데, 묻는 대로 응답을 잘할 뿐더러 물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오르기도 하여 오랫동안 쳐다볼 수가 없으므로 우 임금이 그를 경진에게 맡기나, 경진이 마침내 구족산(龜足山) 기슭에 구금시켜 버렸다.”고 하였다.

경진[京塵]  진(晉) 나라 육기(陸機)의 시 위고언선증부(爲顧彦先贈婦)에 “집 떠나 멀리 노닐러 나갔나니, 유유하여라 삼천 리 길이었네. 서울 거리 돌아오니 어찌 먼지 많은지, 흰 옷이 금방 새카맣게 변하누나.[謝家遠行游 悠悠三千里 京洛多風塵 素衣化爲緇]”라는 표현이 있다.<文選 卷24 爲顧彦先贈婦二首>

경진[黥陳]  한(漢)나라 경포(黥布)가 친 진이다. 어떤 사람이 초(楚)나라 장수에게 “경포가 용병을 잘하여 백성들이 평소에 두려워하였다.”라고 하고, 또 후에 경포가 반란을 일으켜 고조(高祖)와 대치할 때 “경포의 군대가 정예로웠는데 상이 용성(庸城)의 벽에서 멀리 항적(項籍)의 진과 같은 경포의 진을 바라보고 싫어하였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91 黥布列傳>

경진년무과[庚辰年武科]  세조 때에 보인 무과(武科)를 말한다. 조선조의 제7대왕인 세조(世祖)는 즉위한 지 6년 만인 즉 경진년(庚辰年)에 사방을 순행하면서 이르는 곳마다 무과를 실시, 초시(初試)를 보이지도, 또는 규구(規矩)를 한정치도 않은 채 다과(多寡)에 따라 마구 시취(試取)하여, 1년의 통계는 자그만치 1천 8백여인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후세에 말 잘못타고 활 잘 못 쏘는 무사를 ‘경진년무과’라고 불러 조롱하였으니, 무자격자를 함부로 쓰는 것을 조롱하는 말이다.

경진묘성[景辰廟成]  당나라 황실에서는 조상의 이름을 피하여 ‘병(丙)’을 ‘경(景)’으로 바꿔 썼다. 원(元)나라 왕극관(汪克寬)이 지은 춘추호전부록찬소(春秋胡傳附錄纂疏) 권수상(首上) 논명휘차자(論名諱箚子) ‘역갑을지기 이병위경자(易甲乙之紀 以丙爲景者)’ 조의 해설에 “당 고조의 부친 원제의 이름이 병이었기 때문에, 당나라 역사에서 갑자를 기록할 때에는 모두 병을 경으로 하였다. 한유(韓愈)의 유주나지묘비(柳州羅池廟碑)에도 경진년에 사당이 이루어졌다고 칭하였다.[唐高祖父元帝名昞 故唐史紀甲子皆以丙爲景 韓文羅池廟碑 稱景辰廟成]”라는 말이 나온다.

경진수평[庚辰水平]  고악독경(古岳讀經)에 “우(禹)가 치수(治水)할 때에 세 번이나 동백산(桐柏山)에 이르러 무지기(無支祈)란 물귀신을 만났는데, 변화무쌍하므로 우가 경진에게 맡기니 경진이 무지기를 제압하여 구산(龜山) 밑에 가두어 치수를 순조롭게 했다.”고 하였다.

경진염소의[京塵染素衣]  위(魏) 나라 조식(曹植)의 시에 “서울에 풍진이 많으니 흰 옷이 변하여 검어지네.[京洛多塵素衣化爲緇]”라는 구절이 있다.

경진이기망[更秦而幾亡]  진시황(秦始皇)의 분서(焚書)로 유가(儒家) 경전(經傳)이 거의 없어졌던 것을 지칭한다.

경진이퇴[輕進易退]  쉽게 전진하고 쉽게 후퇴함을 이른다.

경질[京秩]  경관(京官)을 가리킨다.

Leave a Reply

Copyright (c) 2015 by 하늘구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