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로원헌[季路原憲] 계로(季路)는 공자(孔子)의 제자인 중유(仲由: 자로子路)의 자(字)이다. 중유(仲由)는 어버이를 위해 쌀을 백 리 밖에서 등에 지고 올 정도로 가난하였고, 위첩의 난[衛輒之難] 때 불행하게 죽었다. 원헌(原憲) 역시 공자(孔子)의 제자인데, 깨끗하게 절의를 지켰고 가난하면서도 도(道)를 즐겼다.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원헌(原憲)이 노(魯)나라에 있을 때에 사방 한 칸의 좁은 집에 잡초로 지붕을 덮고 쑥대로 문을 만들었는데 완전치도 못했으며, 뽕나무로 지도리를 만들고 깨진 독으로 창을 만든 방이 두 개였고, 그 창은 누더기로 가리고 있었다. 위에는 비가 새고 밑에는 습한데 거기에 단정히 앉아 거문고를 뜯고 있었다. 그때 자공(子貢)이 큰 수레를 타고 왔는데, 그 수레 안은 감색(紺色)으로 치장했고 덮개는 흰색으로 꾸몄다. 그러나 그 수레가 커서 골목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자공(子貢)이 걸어가서 원헌(原憲)을 만나니, 원헌(原憲)은 가죽나무 껍질로 만든 모자를 쓰고 뒤꿈치가 다 해진 신을 신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서 문에 나와 맞이했다. 이를 본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아! 선생님은 어째서 이렇게 병이 들었습니까?’ 하니, 원헌(原憲)이 대답하기를 ‘나는 듣건대,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하고, 배워서 실천할 수 없는 것을 병들었다고 하니, 나는 가난한 것이지, 병든 것이 아니네.’ 하였다. 자공(子貢)은 머뭇거리며 무안해했다.”란 내용이 보인다.
계료[計料] ~할 생각이다. 계획이다.
계료[薊遼] 계(薊)는 계주(薊州)로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일대를 가리키고, 요(遼)는 요서(遼西)와 요동(遼東) 지방을 가리킨다.
계료[薊遼] 계주(薊州)와 요동(遼東)을 합칭한 말이다. 계주(薊州)는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계현(薊縣) 지역으로 북경과 인접한 곳이다.
계룡[季龍]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 후조(後趙)의 제3대 황제인 석호(石虎)의 자(字)이다. 도읍을 업(鄴)으로 옮기고 토목공사를 크게 벌이는 한편, 원정군을 세 번이나 일으키며 폭정을 자행해 백성을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결과적으로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
계룡[季龍] 계룡은 후조(後趙)의 3대 황제인 무제(武帝) 석호(石虎)를 가리킨다. 석호는 석홍(石弘)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칭제(稱帝)하였는데, 재위 기간은 334년에서 349년까지이다. 석호가 임금으로 있던 시기에 숙신(肅愼)에서 석호에게 통호(通好)하여 조공하면서 석노(石砮)를 바쳤는데, 4년 만에야 도달할 수 있었다. 석호가 숙신의 사신에게 조공하는 까닭을 묻자, 사신이 대답하기를 “소와 말이 항시 서남쪽으로 향하여 잠자는 것을 3년 동안이나 보고서 대국(大國)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晉書 卷97 肅愼氏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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