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무소출[計無所出] 계획(계책)이 나오는 바가 없음. 생각이 도무지 나지 않음을 말한다.
계무자상주서기[季武子賞邾庶其] 무자는 노(魯)나라의 대부 계손숙(季孫宿)의 시호이다. 춘추 시대 주(邾)나라의 서기(庶其)가 칠(漆)과 여구(閭丘) 두 고을을 가지고 노나라에 붙자, 계무자가 노 양공(魯襄公)의 고모를 아내로 삼게 하고 그 종자(從者)에게도 모두 상을 주었다. 그러자 노나라에 도둑이 많아졌는데, 계무자가 장무중(臧武仲)에게 도둑을 다스리지 못한 것을 문책하니, 장무중이 외국의 큰 도둑을 크게 예우하고서 나라 안의 도둑을 없애기는 어렵다고 말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21年>
계무자성침[季武子成寢]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계무자가 집을 지었는데, 두씨(杜氏)의 무덤이 그 집의 서쪽 계단 아래에 있었다. 두씨의 후손들이 합장(合葬)하기를 청하자 계무자가 허락하였다. 두씨의 후손들이 집에 들어와도 곡(哭)을 하지 않으니, 계무자가 ‘합장은 고례(古禮)가 아니지만, 주공 이래로 합장하여 그 예가 고쳐지지 않았다. 내가 합장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곡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찌 도리이겠느냐.’라고 하고 곡하도록 하였다.[季武子成寢 杜氏之葬在西階之下 請合葬焉 許之 入宮而不敢哭 武子曰 合葬非古也 自周公以來 未之有改也 吾許其大而不許其細 何居 命之哭]”라는 기록이 있다.
계무자위삼군[季武子爲三軍] 주례(周禮)에 “천자(天子)는 육군(六軍)이고, 제후(諸侯)로서 대국(大國)은 삼군(三軍)이다.”라고 하였다. 노(魯)나라는 백금(伯禽)의 봉국(封國)으로, 과거에 삼군(三軍)이 있었으나 그 뒤에 삭약(削弱)하여 이군(二軍)뿐이었다. 계무자가 공실(公室)을 독단하려 하였으므로, 중군(中軍)을 늘려 삼군(三軍)으로 하고, 세 대부(大夫)의 집안이 각각 그 하나씩을 징세하였다.
계문[啓聞] 계문은 관찰사(觀察使)·절제사(節制使) 등이 글을 써서 임금에게 아뢰는 것이다.
계문[啓聞] 조선 시대, 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던 일. 또는 아뢰는 글이다.
계문[薊門] 계구(薊丘)라고도 하며, 당나라 때 북방(北方)의 중진(重鎭)이었던 계성(薊城)을 가리키는데, 당시 유주(幽州)의 치소(治所)였다. 현재 북경의 덕승문(德勝門) 밖 일대 지역이다.
계문[薊門] 연경(燕京)의 덕승문(德勝門) 밖 서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이곳의 숲은 계문연수(薊門煙樹)라고 하여 북경팔경(北京八景)의 하나로 꼽힌다.
계문[薊門] 계문은 북경(北京) 덕승문(德勝門)의 서북쪽 지역으로, 춘추전국 시대 연(燕)나라 땅이다. 계구(薊丘)라고도 하며, 지금은 토성관(土城關)이라고 한다. 왕창령(王昌齡)의 기목시어출유주(寄穆侍御出幽州) 시에 “계문에서 오는 편지 드물다고 말을 마소, 기러기는 형양까지 날아서 올 수 있다오.[莫道薊門書信少 鴈飛猶得到衡陽]”라고 하였고, 유신(庾信)의 연가행(燕歌行)에 “찬 기러기 울어 대며 요하의 물 건너가고, 뽕나무 잎 분분하게 계문에서 떨어지리.[寒鴈嗈嗈渡遼水 桑葉紛紛落薊門]”라고 하였다.
계문[薊門] 일명 계구(薊丘)라고도 하는데, 북경성(北京城) 덕승문(德勝門) 밖 서북쪽에 있는 지명이며 계문연수(薊門煙樹)는 연경팔경(燕京八景) 중의 하나이다. 장안객화(長安客話) 고계문(古薊門)에 “도성의 옛날 계지(薊地)는 계초(薊草)가 많아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지금 도성 덕숭문(德崇門) 밖에 토성관(土城關)이 있는데, 옛날 계문의 터로 전해지고 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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