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양[繫羊] 검소하게 행례하는 것을 말한다. 송(宋) 나라 공순지(孔淳之)가 성품이 고상하였는데, 왕경홍(王敬弘)과 친했었다. 경홍의 딸과 순지의 아들이 혼인할 때에, 타고 다니던 수레에 검은 양을 매어 술병을 차고 가서 행례하였다 한다. <事文類聚 人倫部>
계양[桂陽] 부평(富平)의 옛 이름이다.
계양루판지조[桂陽樓板之爪] 계양군(桂陽郡) 누대(樓臺)의 마룻바닥에 난 백학의 발톱 자국. 계양군(桂陽郡) 사람 소선공(蘇仙公)이 백학을 타고 날아갔는데, 뒤에 읍성 동북쪽 누대에 백학이 날아와 앉았다. 어떤 사람이 백학을 향해 탄알을 쏘자 학이 누대의 마룻바닥을 발톱으로 움켰는데, 그 자국이 “성곽은 그대론데 사람은 달라졌네. 300갑자 만에 돌아왔더니만, 소군(蘇君)인 나를 향해 탄알을 쏜단 말인가?[城郭是 人民非 三百甲子一來歸 吾是蘇君彈何爲]”라는 글귀처럼 보였다고 한다. <神仙傳 蘇仙公>
계양위삽[桂陽衛颯] 위삽(衛颯)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계양태수(桂陽太守)로 임명된 뒤에 학교를 세워 교화를 펼치고, 험한 산길 500리를 뚫어 역정(驛亭)을 설치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어, 10년의 재직 기간 동안 민생을 안정시켰다는 평을 얻었다. <後漢書 卷76 衛颯列傳>
계양진환[繫羊盡歡] 남조(南朝) 송(宋)나라 왕경홍(王敬弘)이 그의 벗 공순지(孔淳之)의 아들에게 딸을 시집보낼 때, 검은 양을 수레 끌채에 잡아매고 술병 하나를 손에 든 채 공순지의 집을 찾아가서는 함께 술을 마시며 한껏 기쁨을 나눈 뒤에 해가 저물어서야 돌아왔다는 데서 인용한 것으로, 재력이 없는 사람이 딸을 시집보낼 때 검소하나마 정성을 다하는 것을 뜻한다. <南史 卷75 孔淳之列傳>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