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운궁[啓運宮] 인조(仁祖)의 생모이다.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로 선조(宣祖)의 다섯 째 아들인 정원군(定遠君)에게 출가하였는데, 뒤에 정원군이 원종(元宗)으로 추존됨에 따라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봉(追封)되었다.
계원[桂苑] 계방(桂坊)과 같다. 계방은 당대(唐代)의 사경국(司經局)의 별칭이다. 옛날에 과거 시험에 급제하는 것을 ‘계수나무를 꺾었다.’라고 하였으므로, 이를 인하여 계수나무가 과거시험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계원[桂苑] 계원은 과거장(科擧場)을 가리킨 말이다.
계원[雞園] 본디 중인도(中印度)에 있던 고대의 사찰 이름으로, 전하여 사찰을 뜻한다.
계원[雞園] 커다란 사찰을 의미한다. 계원은 고대 인도 마갈타(摩擖陀) 왕국의 제3 왕조인 마우리아 왕조의 세 번째 임금 아육왕(阿育王 아소카왕)이 도성의 동남쪽에 지은 거찰인 계원사(雞園寺)를 이른다.
계월[係越] 한(漢) 나라 종군(終軍)의 약관(弱冠)이 무제(武帝)에게 글을 올려 “갓끈 하나만 주시면 남월왕(南越王)의 목을 매어다 바치겠습니다.”라 하였다.
계위[季偉] 후한(後漢) 모용(茅容)의 자(字)이다. 나이 40여 세에 들에서 밭갈이하다가 사람들과 함께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면서 홀로 단정히 앉아 더욱 공손한 자세를 취하였는데[獨危坐愈恭], 곽태(郭泰)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마침내 함께 이야기하고는 하룻밤 묵기를 청하였다. 그다음 날 아침에 모용이 닭을 잡자 곽태가 자기를 대접하기 위해 그러는 줄 알았는데, 이윽고 모용이 모친에게 올린 뒤에 자기는 객과 함께 허술하게 식사를 하자, 곽태가 일어나서 절하며 그 효행을 칭찬하고는 그에게 학문을 권하여 마침내 덕을 이루게 했다는 말이 후한서(後漢書) 권68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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