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자[鷄子] 계란. 달걀.
계자[桂子] 계자는 남의 자제에 대한 미칭이고, 훤화(萱華)는 남의 모친에 대한 경칭이다. 난형(蘭蘅)은 난초, 두형(杜蘅)과 같은 향초이다.
계자[季子] 계자는 전국 시대 유세가(游說家)로 합종설(合縱說)을 제창했던 소진(蘇秦)의 자이다. 소진이 진(秦)나라에 가서 벼슬하고자 진왕(秦王)에게 열 번이나 글을 올려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벼슬을 얻지 못한 채, 검은 담비 갖옷이 다 해지고 여비로 가져간 황금 100근도 다 떨어져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의 형수, 제수, 처첩 등 가족들이 모두 그를 냉대했다. 그가 뒤에 연(燕), 조(趙), 한(韓), 위(魏), 제(齊), 초(楚) 6국(國)의 왕들을 합종설로 유세하여 종약(從約)을 체결하고 나서 6국의 상인(相印)을 한 몸에 차고 왕만큼 호화로운 행차로 고향인 낙양(洛陽)을 지날 적에는 그의 형수 등 가족들이 그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행차 앞에 엎드려 있으므로, 그가 형수에게 묻기를 “어째서 전일에는 거만하게 대해 놓고 오늘은 공손해졌는가.[何前倨而後恭也]”라고 하자, 그 형수가 얼굴을 가리고 대답하기를 “계자의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見季子位高而金多也]”라고 하므로, 소진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가사 나에게 낙양 근교의 토지 두 이랑만 있었다면 내가 어찌 오늘날 6국의 상인을 찰 수 있었겠는가.[且使我有洛陽負郭田二頃 吾豈能佩六國相印乎]”라고 하였다. <史記 卷69 蘇秦列傳>
계자[季子] 전국 시대 유세가(遊說家) 소진(蘇秦)의 자인데, 일반적으로 타국에 사신으로 온 사람을 지칭한다. 소진은 연(燕)·조(趙)·한(韓)·위(魏)·제(齊)·초(楚)등 여섯 나라에게 서로 동맹을 맺고 진(秦)나라를 대항하도록 유세하여 여섯 나라의 상인(相印)을 차고 종약(縱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계자[季子] 전국(戰國) 시대 때 합종책(合從策)으로 육국(六國)의 재상이 되었던 소진(蘇秦)의 자(字)이다. 처음에 소진이 유세하러 나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몇 년 만에 곤궁해져서 집으로 돌아가자 형제, 처첩, 형수, 친척들이 모두 비웃으며 그를 박대하였다. 그런데 뒤에 육국의 재상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의 성대한 행차를 보고 형제와 아내, 형수가 감히 눈을 바로 뜨고 바라보지 못하였다. 이에 소진이 그의 형수에게 “어찌하여 전에는 거만하더니 뒤에는 공손하시오?” 하니, 형수가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댄 채 “계자께서 지위가 높고 금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소진이 “만약 내가 낙양(洛陽)의 성곽 근처에 밭 두 이랑이 있었다면 어찌 육국 재상의 인끈을 찰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史記 卷69 蘇秦列傳>
계자[季子] 춘추 시대 때 오(吳) 나라의 계찰(季札)을 가리킨다. 계찰은 오왕(吳王) 수몽(壽夢)의 작은 아들로 어질다는 명성이 있어서 수몽이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사양한 채 받지 않자 연릉(延陵)에다가 봉하였으므로 연릉계자(延陵季子)라 불리운다. 상국에 두루 조빙하면서 당시의 어진 사대부들과 사귀었으며, 노(魯)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각 나라의 음악을 듣고 각각 비평을 가하면서 정나라의 음악에 대해서는 “아름답도다. 하지만 그 번쇄함이 너무 심하다. 백성들이 감내하지 못할 것이니, 이 나라가 먼저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31 吳太伯世家> <春秋左傳注疏 卷39 襄公29年>
계자[季子] 계자는 춘추시대 오(吳)나라 현인(賢人)인 계찰(季札)을 가리킨다. 계찰이 상국(上國)으로 사신 가는 길에 서(徐)나라에 들렀는데, 서나라 임금이 계찰이 차고 있는 보검(寶劍)을 보고 좋아하면서도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계찰은 그의 마음을 알고 보검을 주고 싶었으나 사신 가는 길이라 주지 못하고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서나라에 들르니 서나라 임금이 이미 죽었다. 계찰이 서나라 임금 묘소 가의 나무에 보검을 걸어놓았다. 종자(從者)가 “누구에게 주십니까?” 하니, 계찰이 “마음으로 이미 주기로 승낙했으니 어찌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하여 내 마음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史記 卷31 吳太伯世家>
계자[季子] 계자는 한(漢) 나라 왕충(王充)을 가리킨다. 매우 가난한 속에서도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저서에만 몰두하여 논형(論衡)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계자[谿子] 고대 중국의 남방에 거주하던 이민족 이름으로 산뽕나무로 만든 쇠뇌로 유명하였다.
계자[啓字] 승정원의 계판(啓版)에 새긴 글자를 말한다.
계자검[季子劍] 계자는 춘추 시대 때 오(吳) 나라의 계찰(季札)로 연릉(延陵)에 봉해졌으므로 연릉계자(延陵季子)라고도 불리는데, 상국(上國)에 두루 조빙하면서 당시의 어진 사대부들과 사귀었다. 일찍이 진(晉) 나라에 사신으로 가다가 서(徐) 나라를 지나게 되었는데, 서 나라의 임금이 계자가 차고 있는 칼을 보고는 갖고 싶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런데 마침 그 자리에 진 나라의 사신이 함께 있었으므로 계자가 즉시 칼을 풀어 주지 못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이미 주기로 마음먹었다. 계자가 진 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서 나라를 다시 지나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서 나라의 임금이 죽은 뒤였다. 이에 계자는 서 나라 임금의 무덤 앞에 있는 나무에다가 칼을 걸어 놓고 떠나갔다. <新序 節士>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