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찰[季札] 계찰은 춘추 시대 오(吳) 나라의 공자(公子)이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임금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므로 연릉(延陵)에 봉하였다. 그러므로 연릉계자(延陵季子)라 칭하였다. 그는 상국(上國)에 빙(聘)하여 당시의 현대사부(賢士大夫)를 두루 교제하였으며, 노(魯) 나라에 들러 악(樂)을 관찰하고 열국(列國)의 치란흥쇠(治亂興衰)를 알았다. 춘추 시대의 현자(賢者)이다.
계찰[季札] 계찰(季札)은 춘추(春秋) 때 오왕(吳王) 수몽(壽夢)의 막내아들로, 연릉(延陵)에 봉해져 연릉계자(延陵季子)로도 불린다. 어질고 재능이 뛰어나 그의 아버지 수몽(壽夢)이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으나 사양하였고, 뒤에 제번(諸樊)과 여제(餘祭) 등 형들이 계속 왕이 되라고 권하였으나 끝까지 사양하였다.
계찰[季札] 오왕(吳王) 수몽(壽夢)의 넷째 아들이다. 계찰이 훌륭한 덕이 있었으므로 수몽이 계찰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계찰이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결국 큰아들 제번(諸樊)에게 왕위를 전수하였고 제번이 죽은 뒤에 수몽의 둘째 아들 여매(餘昧)에게 왕위가 전수되었다. 본래 형제는 차례대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으므로 최후에 계찰에게 왕위를 전수하였으나 계찰이 끝까지 사양하고 도피하였다. 그 뒤 오나라에 제번의 아들 광(光)과 여매의 아들 료(僚)가 왕위를 다투는 변란이 발생하였고 부차(夫差)에게 이르러 오나라가 멸망하고 말았다.
계찰[季札] 오왕(吳王) 합려(闔廬)가 전저(專諸)를 시켜 왕료(王僚)를 시해하였을 때, 계찰이 진(晉) 나라의 사신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선군(先君)의 제사를 폐하지 않고 백성의 신주(神主)를 폐하지 않으며 사직을 잘 받들어 국가를 유지하면 곧 나의 임금이다. 내가 감히 누굴 원망할 것인가. 죽은 이를 애도하고 살아 있는 이를 섬기며 천명(天命)을 기다릴 뿐이다. 나는 혼란을 야기시키지 않고 선인(先人)의 도에 따라 즉위한 자를 따르겠다.” 하고, 복명(復命)한 뒤 묘에 가서 곡하고 조정에 돌아와 합려의 명을 기다렸다. <春秋左傳 昭公 27年> <史記 卷31>
계찰[季札] 춘추시대(春秋時代) 오(吳)나라의 공자(公子)이다. 춘추 말엽에 노(魯)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주(周)나라의 예악을 참관하고 주나라가 천하의 공주(共主)가 되었던 까닭을 알았으며, 주대(周代) 각 국의 음악을 들어 보고는 각국의 치란(治亂)과 흥망을 정확하게 비평하였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襄公29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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